오랫동안 눈독 들이던 영상물이다. 벨리니를 보고 나서 귀를 정화하기 위해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선택했다. 


Electric Picture라는 비교적 듣보 레이블로 출시되었다. 내가 처음 구입했던 오슬로 극장 라보엠이 이 레이블 작품이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는데, 사실 이 레이블로 출시된 오페라는 그 두 개가 전부다. 무엇하는 회사인지 찾아보려 애썼지만 사명이 너무 흔한 이름이라 찾지 못하겠다. 두 작품 모두 한글 자막도 넣어주는 훌륭한 레이블이다. 대신 자막 폰트가 굴림체라는 점은 꽤 거슬린다.

레이블에서 듣보의 향기가 나지만 공연 자체는 빈 슈타츠오퍼의 호화 캐스팅이다. 지휘는 당시 슈타츠오퍼 음악감독을 맡고 있던 벨저-뫼스트이며 연출은 요즘 잘츠부르크의 수장인 스벤-에릭 베흐톨프다. 


아라벨라는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스탈 조합이 낳은 마지막 작품이다. 장미의 기사로 대박을 터트린 이후 그림자 없는 여인과 이집트의 헬레나로 재미를 보지 못한 이들은 다시 장미의 기사 같은 풍의 오페라를 작업하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탄생한 오페라가 아라벨라다. 내용이나 음악적 어법에서 확연히 장미의 기사와 비슷하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장미의 기사의 대중성을 뛰어넘진 못했다.


처음 이 작품을 접한건 틸레만이 지휘한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 공연이었다. 플레밍과 토마스 햄슨이 주연을 맡았다. 틸레만과 플레밍 모두 그나마 슈트라우스에서 가장 괜찮은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햄슨이 슈트라우스를 부르는 것은 약간 의외였는데, 연기는 언제나 그렇듯 훌륭하지만 노래에서 나이를 속이지 못한다는 점은 아쉬웠다.


벨저-뫼스트의 지휘는 틸레만의 지휘와 서로 극단에 위치해있다. 틸레만이 야들야들하고 부드럽고 풍성한 사운드를 추구한다면 벨저-뫼스트는 아주 단단하고 날렵하며 정확한 사운드를 선보인다. 틸레만의 스타일이 어느 순간 낭만적 카타르시스를 준다면 벨저-뫼스트는 과장없이 안정감 있게 극을 이끌어나간다. 오케스트라 파트가 복잡해질 수록 돋보이는 치밀한 정교함은 감탄이 나올정도다. 


아라벨라 역은 에밀리 마기Emily Magee가 맡았는데 역시 훌륭한 슈트라우스 가수다. 목소리에 단단한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프레이징을 선보인다. 연기도 자연스럽다.

마테오를 맡은 미하엘 샤데Michael Schade는 너무나 사나운 모습만 보이지 않았나 싶다. 물론 아라벨라에 미쳐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샤데가 보여주는 마테오는 깊은 짝사랑에 시름시름 앓아가는 베르터 같은 인물이 아니라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 당장이라도 여자를 살해할 것 마냥 불안정한 정신 상태인 동 조세를 보는 느낌이다. 목소리 자체는 강렬하고 힘이 있다. 여담이지만 샤데의 얼굴이 살찌고 머리 큰 디카프리오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수염과 머리스타일 탓도 있을 거다.

즈덴카 역할을 맡은 게니아 퀴마이어Genia Kühmeier 역시 1막에서부터 집중력있는 연기와 초점이 정확한 노래를 들려준다.


이 공연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는 바로 만드리카를 부른 토마시 코니에츠니Tomasz Konieczny다. 빈 슈타츠오퍼 서부의 아가씨에서 잭 랜스를 맡았었는데, 내가 쓴 후기를 다시 읽어보니 배우도 울고갈 연기와 사악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고 평했었다. 하지만 그 정도 평도 너무 박한 것 같다. 아라벨라에서의 모습은 가히 완벽이라 할 수 있다. 들어온느 순간부터 극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낸다. 출연진들 모두 독일어 딕션이 좋은 편이지만 코니에츠니의 딕션은 특히나 훌륭해 집중해서 듣지 않아도 단어를 내 머리 속으로 꽂아준다. 거기에 시종일관 상대 가수를 바라보며 노래하는 모습은 정말 연기란 게 몸에 확실하게 밴 가수의 모습이었다. 목소리도 매우 특이해서 어떤 순간에도 묻히지 않는다. 여기에 선율을 프레이징하는 완급조절도 기가 막히다. 코니에츠니가 등장하여 발트너에게 일장연설을 늘여놓는 부분부터 눈물이 날뻔 했다. 내가 벨리니를 보면서 잊고있었던 오페라의 참 묘미를 코니에츠니가 되새겨주었다.


이 외에 엘레머 백작 역에는 반가운 얼굴 노르베르트 에른스트Norbert Ernst가 출연했다. 이런 정도의 조역에 에른스트는 차고 넘치는 가수다.


발트너나 아델라이데, 밀리 등 다른 가수도 전반적으로 상당히 훌륭했다.


스벤-에릭 베흐톨프의 연출은 무난했다. 언제나 그렇듯 사실적이고 연극적인 깔끔한 구성이 마음에 들었다. 엘레머 백작과 아라벨라의 1막 장면에서 엘레머가 아라벨라에게 인도 풍의 옷을 입히고 자기도 터번을 쓴채로 인터뷰를 녹화하는 듯한 장면이 있었는데 무엇을 의도한지는 잘 모르겠다. 아라벨라를 일종의 소유물 처럼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싶었던건가?

베흐톨프와 벨저뫼스트는 취리히 때부터 자주 공연을 했던 것 같다. 영상물로 출시된것만 해도 팔스타프, 펠리아스와 멜리장드, 코지 판 투테 등이 있다.



굴림체 자막만 빼면 어느 하나 틸레만의 공연에 비해 부족한 것이 없다. 오히려 지휘, 아라벨라, 만드리카 삼인방은 이 공연에 한표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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