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볼까 고민하다가 네편 연속으로 익숙하지 않은 오페라를 보았으니 나에게 주는 상으로 아주 잘 아는 작품을 보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블로그에 글을 쓰고 나서 라 보엠을 한편도 안 썼길래 라 보엠으로 선택했다.


라 보엠은 내가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오페라다. 2012년이었나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틀 동안 라 보엠 공연만 세 군데서 본 적이 있다.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보고 그날 수원으로 달려가 경기필 라 보엠을 보고 다음 날 대전에서 대전오페라단의 공연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혼자 방에 쳐박혀서 영상으로 또 봤다. 


아마 내가 공연장에서 직접 본 것으로 쳐도 가장 많을 것 같다. 한 아홉 번 쯤 보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본 건 2014년 뮌헨의 Pasinger Fabrik에서 본 공연이었다. 생각해보니 보엠을 안본 지가 꽤 오래된 것 같다. 어쩌면 2015년 한 해는 라보엠을 한 번도 안 듣고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


그간 보엠을 안 보고 있던 이유 중 하나는 흥미로운 영상물이 나온 게 없기 때문이다. 이미 나와 있던 DVD는 대부분 다 봤거나 훑어보았다. 샤이의 영상물이 나왔을 때 바로 혹했지만 당시에는 블루레이 한 장 사는게 참 손떨리던 때였고 이미 라 보엠의 결정반은 헤어하임 연출의 오슬로 극장으로 정했는 지라 라 보엠을 더 사는 걸 오랫동안 미뤄왔다. 그러다 마침 알라딘 세일 기간에 다른 타이틀이  39,800원이라는 잭필드 가격으로 나와 쿠폰 금액 맞추기가 애매하던 차에 4만원이 넘는 이 샤이 보엠이 눈에 들어와 바로 구입했다.


보통 오페라 영상물은 극장 이름으로 칭하는 게 자연스럽지만, 이 타이틀의 경우 샤이의 이름이 워낙 압도적이다. 여기에 나오는 가수 이름은 하나도 모르고 연출가도 생소하지만 샤이가 지휘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타이틀을 구입할만 하다. 생각해보면 샤이의 몇 안되는 오페라 블루레이 중 하나인 라이프치히 가면무도회 역시 스타 가수 하나 없는 캐스팅이다. 바렌보임이나 틸레만, 벨저-뫼스트 처럼 요즘 잘 나가는 다른 지휘자들이 호화 캐스팅과 함께하는 반면 샤이는 가수와 상관없이 좋은 결과물을 내놓은 셈이다. 물론 라이프치히 오퍼의 가수들도 뛰어난 가수들이긴 하다. 


이 공연에서도 샤이는 아주 훌륭한 성과를 보여준다. 샤이가 말러나 슈만 브람스 베토벤 현대음악 등등등 다 잘하다보니 이탈리아인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샤이는 푸치니를 탁월하게 조탁해나간다. 틸레만처럼 낭만적으로 무한히 부풀려나가는 형태라든가 벨저-뫼스트 처럼 단단한 앙상블을 보여주는 것과는 다르다. 풍부한 현의 질감, 프레이즈 단위로 살아있는 섬세한 표정을 보여준다. 또한 푸치니의 감각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을 정말로 잘 살려낸다. 푸치니의 오케스트레이션은 음악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아주 훌륭하며 다른 이탈리아 작곡가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하는데 샤이 만큼 이 오케스트레이션의 다채로움을 잘 살려내는 지휘자를 본 적이 없다. 수많은 관현악 레퍼토리에서 다져진 샤이의 오케스트라 감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여기에 이탈리아인 특유의 노래하는 감성이 들어가면서 극을 물 흐르듯 이끌어나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또 성부 조절이 워낙 탁월해 라보엠을 나름 자주 들었지만 샤이의 반주를 듣고 있으면 내가 지금까지 놓치고 있던 부분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반주를 가능하게 한 건 발렌시아 오케스트라의 공도 크다. 발렌시아 극장의 오케스트라는 반지 때부터 느꼈지만 굉장히 수준 높은 앙상블을 보여준다. 아마 스페인의 오페라 삼대장 중 다른 극장인 바르셀로나 리세우, 마드리드의 테아트로 레알보다도 뛰어날 것이다. 여기에 합창단 역시 아주 정확한 노래를 들려준다. 심지어 어린이 합창단 까지 감탄이 나올 정도다.


가수들은 모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맡은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 와 정말 대단하다의 느낌은 아니지만 아쉬움을 느낄 만한 부분은 없다.


문제는 연출이다. 난 어차피 보엠에서 헤어하임을 뛰어넘는 연출이 나올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연출에 별 기대를 하진 않았다. 적당히 화려하고 적당히 사실적이어서 라 보엠 입문 영상으로 소개하기 괜찮은 작품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만 있었다.


내가 라 보엠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면은 1막에서 미미가 Sventata를 노래하며 돌아서고 Che gelida manina까지 이어지는 대목이다. 두 남녀에 묘한 기류가 형성되는 이 장면은 어느 오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완벽한 로맨스 판타지다. 


이걸 표현하는 수많은 방법이 있다. 내가 시중에 나온 영상물은 다 뒤져보며 확인한 거라 꽤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연출가가 설정하는 것은 미미가 로돌포에게 얼마나 마음이 있는가이다. 정말로 열쇠를 잃어버리고 촛불도 바람에 꺼지는 지, 아니면 일부러 촛불을 끄는 건지, 정말로 열쇠를 찾고 싶은 마음은 있는 건지 라든지 말이다. 최근 잘츠부르크 공연에선 미미가 로돌포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으로 나와 로돌포가 그대의 찬손을 부를 때에도 그냥 나가버리려고 한다. 테아트로 레알에서는 미미 스스로 촛불을 끈다음에 손도 자기가 먼저 잡고, 시드니 옛날 공연에서는 로돌포가 열쇠를 주는 척 하다 손을 덥석 잡는다.


이 연출에서는 아예 미미가 촛불을 들고 나가기 전에 열쇠를 숨기는 부분이 등장한다. 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나도 음악적으로 봤을 때 Sventata의 멜로디는 미미가 로돌포에게 마음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열쇠를 일부러 숨기고, 촛불도 자기가 끄고, 그 뒤로 둘다 열쇠를 찾는 시늉도 안하는 건 정말로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 이렇게 말하니까 어떻게 작곡가 지시를 이렇게 어기냐는 미국 꼰대 같아보일 수도 있겠다. 원래 오페라에서 뭘 어떻게 바꾸든 신경을 잘 안쓴다. 촛불이 아니라 담뱃불을 빌리러 와서 가사가 좀 꼬여도 신경도 안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극적인 긴장감이 있어야한다. 서로의 마음을 모르는 두 남녀가 썸을 타는 장면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 연출에선 썸을 타긴 커녕 이미 상황종료다. 둘 표정만 보면 이미 아리아 두 개 끝내고 oh soave fanciulla까지 다 한 것 같다. 그저 의미없이 시간만 때우며 언제 손을 잡고 그대의 찬 손을 부를 수 있을지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결국 푸치니의 가장 아름답고 환상적인 썸 장면은 사라지고 그저 로돌포의 아리아를 위해 존재하는 레치타티보로 전락해버렸다. 



 여기에 사소한거지만 복도에 있지 마라고 하는건 로돌폰데 정작 미미는 방안에 있고 로돌포만 문가에 서 있다. 텍스트 엄숙주의 같은 건 아니지만 그럴 이유가 전혀 없어보이는데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모르겠다. 로돌포가 열쇠를 찾고 아! 외치는 장면은 난로에 기댔다가 뜨거워서 깜짝 놀라는 걸로 바꾸었는데, 그게 열쇠를 찾고 나서 몰래 숨기는 로돌포의 흑심 가득한 깜찍귀여운 행동에 감히 비교할 수가 있냔 말이다.


여기에 로돌포 역시 아리아를 부르면서 자꾸 눈이 다른데로 돌아간다. 이 공연 자체가 너무 샤이 의존적이기 때문일까, 가수들이 노래하다가 지휘를 쳐다보는 경우가 너무 많다. 로돌포와 미미의 1막 아리아의 가장 큰 특징은 이것이 오직 한명에게만 들려주는 아주 개인적인 대화라는 점이다. 아리아를 듣고 있는 미미의 리액션은 굉장히 훌륭한 편인데, 부르는 로돌포는 노래에만 신경쓰고 있다. 과장 좀 해서 표현하자면 이 순간에 오페라의 모든 환상은 사라진다.



그래도 그 외에 전반적인 연출은 나쁘지 않다. 19세기 명화들을 프로젝션으로 활용한 건 굉장히 효과적이다. 프로젝션을 활용하면서도 너무 어지럽지 않은 것은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나중에 찾아보고 안 것이지만 연출가 다비데 리베르모레Davide Livermore(이탈리아 사람인데, 샤이는 다비드 리베르모어 쯤으로 발음했던 것 같다)는 로시니 페스티벌에서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과 바빌로니의 치로를 맡은 바 있다. 두 작품 모두 프로젝션을 극 내내 끊임없이 활용한 오페라다. 이 라보엠에서는 아예 무대 디자인과 영상 디자인까지 본인이 맡았다. 


나는 의상, 무대, 조명 등을 모두 도맡아서 하는 연출가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한 사람이 전체 디자인을 모두 맡았을 때 장점도 있겠지만 대체로 연출가의 역할이 부족하다는 것이 티가 난다. 오페라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새롭게 만들어내고, 텍스트와 음악에 숨겨진 부분을 끌어내고, 감정이 전달되도록 가수들의 연기를 지도하는 등의 역할 말이다. 이런 연출가로는 대표적으로 제피렐리나 루이지 피치가 있다. 이번 연출 역시 시각적 효과는 성공했지만 해석이나 연기 지도 면에서는 상당히 아쉽다. 그래도 쇼나르의 미미에 대한 감정을 상당히 강조했다는 점은 인상적이었다.


20분 길이의 메이킹 필름에는 샤이의 리허설 과정과 샤이와 연출가의 대화가 수록되어있다. 연출가 본인이 음악가이기도 해서 연출이 음악에 매우 자연스럽다는 말을 하는데, 요즘 오페라 연출가 중에서 음악 모르는 연출가가 어디있나 싶다. 이런 영상 마다 '요즘에 음악을 모르는 연출가들이 많지만 우리 A는 음악을 정말 잘 아는 연출가죠'라는 립서비스가 클리셰처럼 등장한다. 연출가가 라 보엠의 2막 장면이 당시 미국 영화의 형식을 따랐다는 아주 잘 알려진 이야기를 열심히도 설명해준다.


음악적으로는 훌륭하지만, 연출은 글쎄. 전반적인 무대의 느낌은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만 세세한 연기 지도와 동선은 오히려 가장 나쁜 축에 속한다고 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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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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