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 극장이 아니라서 무대도 대체로 단촐하다. 천장이 뻥 뚤려있기 때문에 비행기 소리도 굉장히 자주 들린다. 연극 중에 저 시끄러운 소리 어쩌고저쩌고 하는 대목에서 비행기 소리가 크게 드려 사람들이 빵 터졌다. 극장 자체는 정말 아름답다.





원래 클래식 공연 이외에 다른 공연을 잘 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영국에 갔는데 셰익스피어를 안볼 순 없었다. 독일어로 연극을 볼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영어라면 도전해볼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 글로브는 친절하게도 낮공연을 상당히 자주 한다. 내가 있던 기간 동안에는 한여름밤의 꿈과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상연하고 있었는데, 두 작품을 번갈아가며 낮 밤 공연을 올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공연보는 게 여행의 전부인 나 같은 사람에게 적절한 시간대의 평일 낮공연은 꿀 같은 기회다.


문제는 예습이었다. 아무리 영어 연극이라 하더라도 셰익스피어 작품인데 예습 없이 보러갈 순 없었다. 외디프나 명가수 등을 예습할 시간도 별로 없는데 셰익스피어까지 예습해야한다는 건 꽤나 스트레스였다. 일단 페이퍼백을 하나 사긴 했지만 정작 읽을 시간은 별로 없었다. 아무래도 두 작품을 모두 예습하는 건 너무 힘들 것 같아 일단 말괄량이 길들이기만 읽기로 했다. 생각보다 비행기 안에서 노트북을 쓰지 못하는 시간이 많고 지하철 이동시간도 길어 책 읽을 시간이 많았다.


이 공연 역시 예매를 안하고 있었기 때문에 좌석 구조를 공연 전날 밤에야 알게 됐다. 글로브는 700여석 정도의 Yard 티켓을 파는데 입석이다. 보통 오페라 극장에서 입석이라고 하면 가장 구석에 있기 마련인데, 글로브의 야드는 무대 바로 앞을 말한다. 야드와 좌석의 가격차이도 상당히 나는 편이고, 바로 앞에서 볼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기에 현장에 가서 야드 표를 사기로 했다.


공연 1시간 30분 전에 도착한 것 같은데 야드 줄을 선 관객들이 10여명 정도 보였다. 바람도 엄청나게 부는 날씨였는데 참 대단들하다. 한여름밤의 꿈은 매진인 공연이 많았지만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표가 어느정도 남아있었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나도 줄을 서서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렸고 다행히 무대 바로 앞에 설 수 있었다.



무대의 높이는 딱 내 턱까지 올라오는 정도였다. 그래서 팔꿈치와 턱을 무대 위에 걸치고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정말 가수들 침튀기는 것 까지 다 보이는 초근접 거리. 공연이 시작되기 전, 연출가가 무대 위에 올라와서 비보를 전했다. 원래 카타리나 역을 맡기로 한 배우가 저번주에 공연 중에 다리를 다쳐 급하게 대역을 구했는데 연습할 시간이 너무 부족해 쪽대본을 들고 공연하는 걸 양해해달라고 했다. 공연이 취소되지 않은 게 어디인가.

공연이 시작하기 전에 악사들이 등장해서 17세기 풍의 음악을 들려준다. 젊은 고수가 신나는 환영인사로 관객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공연이 시작됐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원래 취객 슬라이를 골탕먹이기 위한 극중극으로 진행되는데, 이번 연출에서는 그 파트를 삭제하였다. 대신 새로운 액자형식을 취하는데, 2016년의 우리가 1916년 아일랜드 여성들이 겪는 사건을 바라보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Misogyny가 매우 심한 작품이다. 그렇기에 요즘 시대에 공연하는 것이 쉽지 않은 작품인데, 연출가는 작품 속 미소지니를 잔인하게 부각시키며 이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사실 원작에서 카테리나의 비중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데, 처음 프롤로그에서 카타리나 역 배우가 혼자 노래하는 파트를 집어넣어 작품의 중심이 카테리나가 겪는 비극이라는 것을 명시한다. 

이 순간이 정말 마법 같았는데, 뭐라 형언할 수가 없다. 배우가 쪽대본을 들고 등장하여 거친 목소리로, 울먹이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내가 가사를 절반도 이해하고 있지 못하지만 눈물이 났다. 그 표정과 목소리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중에 글라인드본에서 만난 할머니가 해준 이야기였는데, 에딘버러 축제에서 외국어 공연을 볼때면 대사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배우의 표정과 목소리에 더 집중하여 마법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고 했는데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내 눈앞에 있는 배우는 억압받는 말괄량이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표정과 목소리를 보여주었다.


그 뒤로 등장하는 루첸티오와 트라니오 콤비. 아 이거 희극이었지? 진짜 빵빵 터지는 연기가 뭔지 보여준다. 두명의 배우가 보여주는 폭발력이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도 세세한 동선, 가만있을 수 없는 두 혈기 넘치는 배우를 통해 셰익스피어의 대사 하나하나가 살아서 움직인다. 

여기에 루첸티오는 흑인으로, 트라니오는 여자로 등장한다. 글로브의 새 감독이 극의 성비를 맞추겠다고 했고 이런 노력의 결과인지 루첸티오의 두 하인인 트라니오와 비온델로, 페트루키오의 하인 그루미오가 여자로 등장한다. 남성 지배 사회에 똑똑한 하인이 여성이라는 점은 작품의 미소지니를 부각시키는데 더욱 효과적이다. 단순히 기계적인 성비를 맞추었다는데 의미가 있는게 아니라 연출의도와 부합한다는 점이 더 인상적이다.


사실 연극을 보기 전에 이해를 못하면 어쩌지, 혹시 지루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했는데 모두 기우였다. 트라니오의 능청맞은 연기는 내가 글로 읽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뽐냈다. 루첸티오 역시 분명 셰익스피어 대사를 읊고 있는데 로맨틱 코미디에 나오는 사랑에 빠진 인물의 매력적인 전형을 보여준다. 


여기에 연출은 또 얼마나 재밌던지. 비앙카의 과도한 '여성적' 교태는 남성 사회를 대하는 카테리나와 비앙카의 대립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관객들을 키득거리게 만든다. 카테리나와 비앙카가 줄로 서로를 묶으며 다투다가 아버지 바티스타를 두고 빙빙돌고, 이어서는 아예 줄넘기를 시키는 장면은 예상치 못한 웃음 포인트였다. 여기에 코믹한 배경음악까지 곁들여져 엄청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페트루키오는 완전한 악인으로 등장한다. 물론 비현실적인 악인이 아니라 전형적인 가부장적 마초 남성의 모습으로. 페트루키오의 만행이 절대 희극적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연출가가 꽤 고심한 것 같은데, 의도적으로 정적의 순간을 많이 넣었다. 또한 배경음악 역시 긴장감과 위기감이 진하게 배어나왔기 때문에 누가봐도 더 이상 희극적이지 않도록 만들었다.


머릿 속에 잊혀지지 않는 장면은 페트루키오가 카테리나를 만나며 멋대로 행동하는 부분에서 관객의 반응이었다. 내 뒤에 있던 관객 한명이 페트루키오의 막무가내 같은 마초적 모습에 계속 웃음을 터뜨렸는데, 인터미션때 보니 히잡을 두른 이슬람 여성이었다. 그 장면 부터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지기 시작한 백인 여성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상대방을 인종과 종교로 먼저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은 알지만, 너무나 강렬한 대조였다. 많은 (백인) 여성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페트루키오의 만행에 거의 질색하며 카테리나를 너무나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다들 그런 폭력을 겪어본게 아닐까 생각이 들 만큼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런걸 대수롭지 않게 깔깔 웃는 히잡 쓴 여자라니. 편견일 수 있지만 아마 남녀차별을 가장 심하게 당하며 자란 사람일 텐데 말이다.


마지막, 페트루키오에게 완전히 조련되어 영혼이 사라진 듯한 카테리나의 모습은 정말로 충격적이었다. 쪽대본을 들고 연기하기에 아무래도 몰입을 떨어뜨릴 수 밖에 없는데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기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사를 외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인물 그 자체가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었다. 무대에 있는 순간 그 배우는 카테리나 그 자체였다. 미소지니로 가득찬 마지막 독백을 피해자의 공허한 울림으로 만들어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이 끔찍한 비극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사진 왼쪽이 비온델로. 오른쪽은 비앙카


관객 바로 앞에서 하는 연극 답게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도 꽤 적극적이었는데, 실신한 루첸티오를 깨우기 위해 트라니오가 관객에게 물좀 달라고 요청하는 부분 역시 사소하지만 즐거웠다. 나한테는 저런 기회 안오나 하고 있던 찰나, 2부 처음 비온델로가 페트루키오의 엽기적인 행색을 정신없이 묘사하는 장면에서 무대에 머리 올려두고 있던 나한테 오더니 나를 돌려세우고 양다리로 내 머리를 감싼채로 팔로는 내 머리를 흔들며 페트루키오가 타고오는 '비루한 말'을 묘사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저 신기해서 웃을 뿐이었다. 그 장면이 끝나고 이어지는 결혼식 장면에 배우가 나한테 다가와서 정말 고맙다고 악수를 청했고 커튼콜 때도 나에게 와서 고맙다고 또 말해줬다. 전날 홀텐을 못 만난 운을 여기다 썼나보다.



정말 머릿 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공연이다. 이 글을 쓰기 전날 대학로에서 본 엘리펀트 송이 여러모로 실망스러웠기에 더더욱 이 공연이 소중하게 기억된다. 이게 바로 영국이 자랑하는 예술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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