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부인의 진정한 걸작 프로덕션을 드디어 찾았다.


시대적, 역사적 배경이 뚜렷한 오페라는 연출이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하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세 오페라가 아이다, 나비부인, 투란도트다. 프로덕션들마다 저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똑같은 이야기가 될 뿐이다. 그렇기에 이 세 작품에서 위대한 연출의 등장을 더욱 갈구하게 된다. 


슈타츠오퍼 함부르크의 나비부인 영상이 처음 나왔을 때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트레일러 영상을 보고 어쩌면 내 갈증을 해소시켜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사각형의 닫힌 방, 비현실적이지만 상징적인 조명의 활용, 청바지와 기모노가 조화된 의상 등을 보면 이건 뭔가 다를 것 같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연출을 맡은 뱅상 부사르는 이미 블로그에서 두 번이나 리뷰한 연출가로, 라 파보리트와 카풀레티와 몬테키의 연출을 맡았었다. 사실 두 연출에서 모두 연출가의 탁월함 보다는 의상을 맡은 크리스티앙 라크루아의 천재성에 감탄했었다. 부사르가 올해 잘츠부르크 부활절에서 틸레만 지휘의 오텔로에서 연출을 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제일 먼저 확인한 건 의상이 라크루아인가 였다. 이 나비부인을 사기 전에도 의상이 라크루아인지 확인했을 정도였다. 사실 부사르는 바지사장이고 라크루아가 본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프로덕션은 부사르의 연출 능력을 제대로 보여준다. 오히려 라크루아의 의상은 상대적으로 묻히는 감이 있는 편이다. 일단 그동안 나비부인의 연출에서 화려한 일본풍 의상은 이미 자주 나왔으며, 그 일본풍 의상이라는 게 서양 디자이너들이 일본의 의상 스타일에 영감을 받아 새로이 창조한 스타일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언급할 수 있다. 라크루아 의상의 특징은 유럽 귀족 풍이면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환상적 스타일이라는 점인데 나비부인에서는 그러한 장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의상의 기본적인 센스가 상당히 돋보이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1막 마지막 듀엣에서 초초상이 옷을 한꺼풀 씩 벗는 장면은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가는 과정과 같았다.


이 연출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건 소름돋는 디테일 연기다. 오페라를 새롭게 해석해내는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과 그걸 이루기 위한 세세한 연기 지도다. 이 프로덕션은 이 디테일에서 감탄이 나온다.

대표적인 장면을 꼽아보자. 2막의 편지 읽는 장면은 내가 나비부인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면인데, 여기서 부사르는 나비부인이 샤플레스에게  편지를 읽어달라고 장면에서 나비부인이 직접 편지를 붙잡고 뚫어져라 바라보게 함으로써 이 장면의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나비가 편지를 대신 읽어달라고 하는 이유는 아마 둘 중 하나일텐데, 편지를 직접 읽을 용기가 없거나 영어를 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사르는 의도적으로 뒤에서도 글씨가 비치는 편지지를 선택했고, 카메라로 잡았을 때 대충 알파벳 필기체가 잘 드러나게 했다. 때문에 나비가 영어를 못 읽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전달한다. 바로 전 장면에서 자신의 나라는 미국이며 미국의 신과 미국의 법을 이야기하던 나비가 말이다. 여기에 샤플레스는 편지를 뒤에서 읽어주다가 어느 새 멀찍이 떨어져서 편지의 내용을 읊조린다. 오페라에서는 편지 장면이 상당히 자주 등장하는데, 읽는 사람이 편지와 얼마나 익숙한지가 연출의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샤플레스가 편지를 직접 보지 않고도 편지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곧 편지의 내용을 모두 외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연출 장치이다. 샤플레스는 1막에서부터 핑커튼에게 경고하며 나비의 불쌍한 운명에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나비에게 찾아오기 전, 편지의 내용을 어떻게 전달해줘야할까 막막해하며 같은 내용을 몇번이나 읽어보았을 샤플레스의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한 인물이 다른 등장인물의 가사를 동시에 따라 읊는 것 역시 오페라 연출에 자주 등장하는 트릭이다. 두 인물을 동일한 존재로 만드는 비현실적인 장치로도 활용할 수 있는데, 부사르는 가장 유명한 아리아 Un bel dì에서 이를 현실적인 장치로 활용한다. 나비가 핑커톤이 도착하면 자신이 할 일을 노래하는 장면에서 스즈키 역시 가사를 똑같이 읊조린다. 나비가 같은 말을 스즈키 앞에서 수도 없이 반복했다는 거다. 이 아리아의 비극성이라면 결코 실현되지 못할 꿈이라는 것에 있는데, 나비가 정신병 수준으로 이 비현실적인 꿈에 집착해왔다는 걸 스즈키의 행동이 보여준다.


2막 후반부에서 핑커톤의 배가 항구로 들어오고 대포가 울리는 장면 역시 부사르의 연극적 감각이 돋보인다. 대포 소리가 울리면 순간 정적이 이어지고, 나비와 스즈키는 설레는 마음으로 배의 이름을 확인한다. 설렌다라니, 감히 이런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닐 것이다. 나비가 앞선 아리아에서 노래했듯이 그것은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기대다. 배의 색깔과 국기를 확인하고 스즈키에게 쓰러지지 않게 손을 잡아달라고 하며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이야 말로 나비가 3년 동안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기다리던 시간이다. 부사르는 나비가 들뜬 마음에 차마 이름을 확인하지 못하고 손으로 눈을 가리다가 아주 천천히 배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아, 나비의 마음이 이렇게 절절하게 다가오는 순간을 본 적이 없다.


이런 디테일한 연기지도 이외에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을 제시한다. 1막에서 핑커톤이 술을 마시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는 점에서 착안했는지 결혼식 내내 다른 사람과 건배를 하며 술을 마시는 것으로 표현한다. 나비와의 사랑이 전형적인 술에 취한 남성의 책임감없는 사랑이라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비가 자결하기 전 무대에 술병과 술잔, 핑커튼의 편지가 덩그러니 놓여져있는 것 역시 핑커톤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1막의 나비가 게이샤의 조신한 인상처럼 아주 다소곳하게 있는 다른 연출과는 달리 결혼으로 설레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역시 인물의 사실성을 덧붙여준다. 그간 '조신한 일본 여성'의 프레임에 갇혀 나비부인이 얼마나 단조로웠는지 절실히 깨닫게 하는 장면이다.

최고의 아이디어는 나비부인의 아들이 인형이라는 점이다. 밍겔라처럼 상징으로써 인형이 아니라 진짜 존재 자체가 인형이다. 처음에는 저것이 상징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데, 이내 의문을 확실하게 해결해주는 충격적인 장면이 이어진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카슨 탄호이저 피날레에 버금가는 충격 반전으로 꼽고 싶다. 오페라 연출 전체를 통틀어서 손꼽을 명장면이다. 

아이가 사실은 인형이라니, 나비부인을 가장 개연성있게 설명할 수 있는 컨셉이 아닐까. 나비부인으로 학생들에게 수업했을 때 가장 많았던 반응은 '나비부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였다. 3개월 만난 연인을 위해 3년을 기다리다가 자결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사람의 행동이겠냐는 것이다. 부사르는 나비의 처절한 심리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아기는 그저 필요에 의해 탄생한 객체다. 나비가 핑커튼을 기다리는 이유, 기다려야만 하는 이유, 핑커튼이 나비를 다시 찾아와야하는 이유. 부클릿에 담겨있는 드라마투르그와의 대화에서 부사르는 아기가 실제 인간이든 인형이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에서 아기가 차지하고 있는 본질을 예리하게 꿰뚫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이다. 이야기의 개연성은 줄어들지언정, 핍진성은 오히려 극대화된다. 아기 때문에 떠난 남편을 3년 동안 기다리는 여자는 개연성이 있지만, 실재할 것 같지는 않다. 반대로 떠나간 남편에 대한 집착으로 가상의 아기까지 만들어내는 여자의 이야기가 21세기 사회에서는 더 있을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 장치를 위해서는 이야기 안에 조력자가 한명 필요하다. 바로 샤플레스다. 인형 아기를 데리러 핑커튼이 나비를 찾아올 리는 만무하다. 핑커튼은 진짜로 아기가 있다고 믿어야만 한다. 인형을 진짜 아기로 둔갑시키는 역할은 샤플레스가 맡아야만 한다. 2막에서 나비가 인형을 아기라고 소개하는 장면에서 나비의 정신 상태에 진심으로 동정하여 핑커튼에게 이야기를 꾸며내줘야한다. 부사르는 샤플레스의 캐릭터를 사실적으로 살려낸다.


사실 오페라를 주인공의 정신병으로 설명해내는 사례는 흔하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고전이 된 하리 쿠퍼의 화란인, 헤어하임의 수많은 연출을 들 수 있다. 정신병으로 한정짓지 않고 꿈 속의 이야기 까지 포함한다면 그 예시는 훨씬 늘어난다. 어쩌면 화란인 처럼 핍진성 없는 오페라에는 정신병이야 데우스 엑스 마키나오 같은 만능이지만 진부한 솔루션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이 해석이 현대적이고 매력적이라는 내 의견에는 변함이 없다. 이제서야 나비부인이 박제핀에서 벗어나 살아서 날아올랐다.



음악 역시 상당히 만족스럽다. 대체적으로 모든 가수들의 스타일이 부드럽게 노래하는 편이고, 지휘자 알렉산더 요엘(빌리 조엘의 이복동생)의 반주 역시 달콤하고 탐미적이다. 샤플레스의 노래는 살짝 바보같이 들릴 때도 있을만큼 둥그스럼하니 부드럽고 테너의 목소리 역시 보통의 스핀토가 아닌 전형적인 리릭에 가깝다. 나비부인의 경우 오케스트라를 뚫을 수 있는 성량을 가져야하다보니 비브라토가 심해지기 마련인데 비브라토가 과하지 않아 흡족했다. 가사 하나하나의 느낌을 잘 전달하며 나비부인이 보여줘야할 다채로운 감정들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이 작품의 경우 아름다운 음악이 진부한 연출에 묻히는 케이스인데 이젠 연출이 음악의 멜랑콜리한 감정을 극대화시킨다.


콘비츠니의 라 트라비아타, 헤어하임의 라 보엠과 견줄만한 작품이다. 나비부인의 영상물 결정반으로 손색이 없다.

블로그 이미지

D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