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렌보임의 지휘에 사샤 발츠의 연출.


현재 활동하는 지휘자 중에 바그너를 가장 잘 하는 사람을 꼽자면 바렌보임을 택하겠다. 20년 전 바이로이트 때도 훌륭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내뿜고 있다. 바렌보임에 견줄 수 있는 사람은 키릴 페트렌코 밖에 없을 것 같다.


연출 사샤 발츠Sashwa Waltz는 원래 연출가가 아니라 베를린 샤우뷔네에서 활약한 안무가다. 검색해보니 현대 무용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안무가인 듯 하다. 성이 Waltz라니,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안무가 출신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이 프로덕션에서 안무까지 도맡았다. 여기에 무대 디자인에까지 공동으로 이름을 올려놨다.


난 연출가가 무대, 의상 등을 겸업하는 걸 싫어한다. 시각적 디자인과 오페라 전체를 해석해내는 연출은 완전히 다른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무를 맡은 연출가라니, 상당히 색다른 조합이다. 탄호이저의 바카날 부분이 중요하기 때문에 안무가의 비중이 높은 편이지만 안무가가 전체 연출을 맡으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꽤나 독특하다. 


1막의 바카날은 남녀 무용수들이 사타구니만 가린 채로 등장한다. 안무는 확실히 끈적한 퇴폐적 느낌을 살리면서도 세련돼있다. 국립오페라단 루살카의 안무가 다시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 정도는 돼야 섹스 파티라고 하는 겁니다. 라크루아의 의상이 클래스가 다르듯, 발츠의 안무도 확실히 급이 다르다. 발레를 보면서 '몸의 언어'가 무엇인지 감을 잡지 못했는데 발츠의 안무는 수수께끼 같으면서도 묘한 매력이 있었다. 직접적인 행위의 묘사가 아니라 몸짓으로 분출하는 에너지를 통해 장면을 묘사한다. 


바카날에서 무용이 두드러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발츠는 다른 장면에서 까지 무용을 적극 활용한다. 순례자의 합창이나 2막 입당행진곡에서도 무용수를 끊임없이 활용한다. 심지어 1막 피날레에서 기사들과 탄호이저의 중창에서도 가수들이 간단한 안무를 곁들여가며 노래한다. 극의 장르가 아예 음악을 곁들인 무용극으로 변모한다. 오페라에 쓸데없는 안무를 곁들이는 건 싫지만 발츠의 안무는 음악에 상당히 잘 어울린다. 음악 프레이즈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느낌으로 묘한 중독성이 있다. 바렌보임이 지휘한 스칼라 라인골트에 나오는 끔찍한 안무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이야기에 별다른 해석을 넣지 않는다는 점은 바그너 연출에 있어 중요한 단점이다. 하지만 발츠의 연출은 이 단점을 잘 피해간다. 이야기를 담백하게 원형만 제시하는 대신 무용을 통해 음악을 직접적으로 표현해낸다. 어차피 관객들이 탄호이저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해석은 관객에게 맡겨두고 음악 텍스처에만 집중하는 형태라 할 수 있다.


가수진은 바렌보임 답게 전반적으로 훌륭하다. 탄호이저 역의 페터 자이페르트는 이제 은퇴할 때가 다 된 것 같은데도 노익장을 과시한다. 목소리가 뻗어나가는 힘은 부족하지만 프레이징에서 여유와 기교가 넘친다. 오히려 몇년 전 리세우 공연 영상 때보다 훌륭한 기분이다.

엘리자베트 역의 안 페테르센Ann Petersen은 무난하지만 베누스 역의 마리나 프루덴스카야Marina Prudenskaya는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가수다. 끊임없이 지휘자와 탄호이저를 번갈아보며 방황하는 시선은 해도해도 너무했다.


그래도 가장 뛰어난 가수는 볼프람 역의 페터 마테이를 꼽고 싶다. 메트 파르지팔에서도 훌륭했지만 마테이의 걸쭉하며 부드러운 음성은 볼프람을 맡기에 적격이다. 명확한 독일어 딕션 역시 일품이다.

그 외에 헤르만 역의 르네 파페와 발터 역의 페터 존Peter Sonn이 상당히 괜찮다. 


바렌보임의 지휘는 기대했던 대로 압도적이다. 바렌보임 특유의 폭발하는 사운드는 들을 때마다 놀랍다. 머신 러닝으로 지휘자를 구분하라고 한다면 저 소리는 확실히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묵직함과 파괴력, 밸런스를 모두 갖춘 음색이다. 다른 건 몰라도 바그너에서 만큼은 꼭대기에 있는 지휘자란 걸 다시금 확인하게 하는 연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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