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헤어하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 연출가다. 가장 좋아한다는 건 주저하지 않고 단 한명으로 꼽을 수 있다는 의미다. 자기 이름 하나로 오페라 프로덕션을 기대하게 만들 수 있는 몇 안되는 연출가 중 한명이다. 나는 헤어하임 연출의 공연이라면 지휘자나 가수, 오케스트라에 상관없이 무조건 볼 용의가 있다. 헤어하임은 오페라를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재창조해낸다. 푸르트뱅글러의 베토벤 9번은 일종의 다른 곡 취급을 받는 것 처럼, 헤어하임이 연출한 오페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취급해야한다.


헤어하임은 오페라의 이야기를 완전히 새롭게 창조해낸다. 단순히 배경을 옮기고 인물들의 행동을 독특하게 변경하는 것 정도가 아니다. 그는 리브레토와 스코어로 만들어낼 수 있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보여준다. 예컨데 라 보엠은 모든 이야기를 로돌포가 죽은 미미의 환상을 보는 것으로 해석해낸다. 장르 자체가 로맨스에서 심리 스릴러로 바뀐다. 오네긴 역시 순서를 뒤섞어 놓으며 역사 속의 러시아의 흐름을 바꿔낸다.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은 대사를 다 바꿔서 남녀간의 사랑의 본질에 대한 토론이라는, 정말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바꾼다. 저렇게 표현하는 것 말고 달리 표현할 방법을 모르겠다. 바이로이트 파르지팔 역시 독일의 역사 흐름을 배경으로 한다. 명가수는 작스와 베크메서의 이야기로 뒤바뀐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이야기를 뒤바꿔도 큰 틀 안에서 이야기가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헤어하임의 연출은 시각적으로 상당히 아름답다. 마틴 쿠세이나 칼릭스토 비에이토 처럼 전위적인 표현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오페라에서 '아 정말 아름답다'라는 생각이 물씬드는 장면들을 화려하게 연출해낸다. 무대 장치들이 매우 정교해서 예상치 못한 장면들을 보여주기도 하며 '환상적'인 그림들을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기괴한 장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합창단은 대부분 비정상적인, 현실의 것이 아닌 존재들로 등장한다. 


가장 큰 단점은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작품 안에 수많은 장치가 있고, 수미상관이 많아서 처음 봤을 때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상징인지를 파악하다 보면 오페라가 다 지나간다. 그래서 유독 헤어하임의 공연 영상은 다시 보게 된다. 그의 라보엠은 내가 가장 여러번 본 오페라 영상이다. 다시 볼 때마다 조그마한 장치들에 놀라며 그걸 하나하나 알아갈 때 마치 퍼즐을 맞추는 즐거움을 느낀다. 그의 연출에서는 한번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음악적 패시지나 가사들을 발견하게 된다. 


루살카 역시 작년에 구입하고 한번 본 적이 있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나서 처음으로 중복 시청한 공연인 셈이다. 처음 보았을 때 난 역시 멍청하구나를 깨닸고 다시 한번 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저번 오토 솅크의 루살카를 보며 숨이 턱턱 막혀서 헤어하임이 아주 절실하게 필요했다.


사실 두번째 보고나서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서 글을 쓰기가 두렵다. 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예찬하는 인간이 있다니 참 우습지 않나. 하지만 어쩌겠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재미없다는 건 절대 아니다. 난해한 현대 미술 앞에 서서 그 기호들을 해석하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는 것이 색다른 기쁨인 것 처럼, 헤어하임의 연출을 따라가기 위해 두뇌를 풀가동하는 것도 나에겐 행복이다.



헤어하임의 특기 중 하나는 오페라가 시작하기 전에, 정확히는 음악이 시작하기 전에 극을 진행한다는 거다. 오페라의 스코어는 바꿀 수 없어도 스코어가 시작하기 전에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으니까. 배경은 현대 브뤼셀의 거리. 지하철역 입구 앞에서 불량해보이는 여자가 꽃을 팔고 있다. 이 여자가 예치바바다. 음악이 시작하고 보드닉이 퇴근하는 직장인 처럼 지하철 역에서 나온다. 보드닉은 지하철역 입구 맞은편 집에 사는데, 발코니에서 부인이 기다리고 있다. 이 부인이 외국 공주역이다. 음악 모티프에 맞춰 루살카가 등장하는데, 술집 여자 같은 화려한 복장이다.


쓰고 나니 이걸 어차피 글로 다 설명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의식의 흐름대로 내 스스로를 위해서 써보겠다.


정말 기억나는 대로 짧게 적어본 것이다. 아 난 멍청하다. 다시 한번 봐야겠다. 지금껏 본 헤어하임의 연출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 그냥 부분부분으로 쪼개면 즐겁지만, 이야기를 하나의 플롯으로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대체적으로 요약하자면 보드닉이라는 나이든 남성이 가진 여자에 대한 비뚤어진 이상과 성욕과 소유욕, 그리고 그것이 투사된 환상들. 그럼에도 이걸 기어이 이해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건 이야기가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후기를 쓰면서 내가 오페라를 보고 나서 이렇게나 할 이야기가 없다는 것에 자괴감을 많이 느낀다. 

가사 한줄 한줄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걸 발견하고, 음악의 모티프들이 분명하게 무대 위에서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는 건 정말 즐겁다. 사실 전체 플롯을 생각하지 않고 부분부분 음악과 무대의 연관성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연출이다. 


아, 연주와 노래는 훌륭하다. 루살카는 아주 훌륭하며 플레밍보다 낫다. 보드닉의 윌러드 화이트 역시 대단한 베이스고 테너도 뛰어나다. 아담 피셔의 반주 역시 네제-세겡보다 낫다. 네제-세겡이 너무 낭만적인 관현악에만 초점을 맞추어 선율적인 아름다움을 살렸다면 피셔는 체코의 색채를 더 잘 살려냈으며 더 간명한 아티큘레이션을 활용한다. 


나는 이런 창조적인 연출을 사랑한다. 헤어하임은 어떻게 오페라 연출이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런 천재가 다른 거 안 손대고 오페라에 미쳐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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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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