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베르디 - 라 트라비아타 (LA 오페라)

광활한 홀

 

맨 뒷자리가 이 정도로 멀리 떨어져있다. 거의 세종급 아닌가

이날 일정 상당히 고민 많이했다. 엘에이 오페라 공연이  마침 학회 끝난 다음날 바로 있는건 행운이었으니 당연히 보러가려고 했는데 강력한 경쟁상대가 있었으니… 바로 류현진 선발 경기가 이날이었다는 점이다. 출국하기 전부터 대충 로테를 계산해보니 우천취소가 나지 않는한 분명 이 날이 류현진 선발이었다. 당시 류현진은 10승을 노리고 있고 한창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때. 류현진이냐 엘에이 오페라냐.

 

미국에 와서 야구를 안보고 오페라를 보겠다는 건 객관적으로 봤을 때 너무 멍청한 일이 아닌가. 미국 야구랑 미국 오페라의 완성도와 세계적 랭킹으로 따지면 차이가 나도 한참 나는데. 그래도 한때 심심하면 혼자 대전 야구장 여러번 가고 한화 오랫동안 응원해보고, 류현진 김광현이 처음으로 선발 맞대결한다고 해서 야구장 달려갔다가 우천취소돼서 슬퍼했었는데, 류현진이 젤 잘나갈 때 한번은 봐야하는 거 아닌가. 그때 기다리던 인파를 뚫고 돌진해 나가던 류현진 몸이랑 스치기도 했었는데! 마 내가 류헨진 몸도 만져봤다 아이가!

 

하지만 이런 고민을 하며 멍청한 생각 하나가 내 뇌리를 지나쳤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은 구분해야한다. 류헨진이를 엘에이에서 보는 건 내가 나중에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일로 사적인 욕심이지만, 류헨진 관람기 정도는 나 말고 수많은 사람이 쓸 수 있는것 아닌가. 엘에이 오페라를 보고 이땅의 오페라 덕후들을 위해 미국 오페라의 현실을 직접 보고 기록으로 남겨 전하는 건 공공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미국 오페라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지만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보고 알려주는 사람도 있어야지. 그래도 LA 오페라면 미국의 나름 메이저 오페라 중 하나고 영상물도 간혹 발매하는 곳이다. 그래도 미국 빅5는 들지 않겠나? 이 정도면 한번 직접 조사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 글은, 한 멍청한 인간이 류헨진 경기를 포기하고 웬만한 야구장 티켓보다 두배는 더 비싼 LA 오페라를 보고 나서 쓴 기록이다. 내가 버린 시간과 돈보다 이 후기가 더 가취있기를….

 

오페라 극장은 월트디즈니 콘서트홀 바로 옆에 있다. 역시 미국 아니랄까봐 공연장 이름도 LA 문화계 발전에 큰 힘을 썼던 도로시 챈들러의 이름을 땄다. 음악감독 명칭도 Richard Seaver Music Director 인데 Richard Seaver는 석유 시추회사 임원으로 LA 오페라 후원자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돈을 내면 음악감독 이름도 팔아주는데, 우리나라도 후원금을 받으려면 아예 화끈하게 이런식으로 하는게 좋지 않을까. 엊그제 서울시향 새로운 후원회원 제도 이름이 나왔던데 여긴 반대로 무슨 지휘자 이름을 후원회원 등급으로 해놨어… 차라리 음악감독 명칭을 바꿔서 “서울시향의 새로운 이재용 음악감독에 오스모 밴스캐가 선임되었다. 오스모 밴스캐는 말러 교향곡 2번 공연으로 이재용 음악감독의 임기를 시작한다” 라고 하는게 낫지 않을까. 여튼 이런걸 보면 미국 참 신기한 나라다.

로비에 가니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프리렉처를 듣고 있었다. 상당히 빠른 템포로 줄거리와 해당 음악을 쭉 훑어주는데 보통 솜씨가 아니더라. 나이가 꽤 있는 할아버지가 강연하길래 어디 음대 교수 쯤 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지휘를 맡은 “리처드 시버 음악 감독” 제임스 콜론이었다.

상당한 규모의 프리렉처. 역시 도밍고 오페라 아니랄까봐 예시로 나오는 음원은 도밍고였다

그렇게 공연이 시작됐는데…. 

 

시작부터 망조가 느껴졌다. 

총체적 난국, 악몽 그 자체였다. 지휘, 오케스트라, 출연진, 연출 하나하나가 누가 더 끔찍한지 대결이라도 하는것 같았다. 콘론 이 양반은 유럽에서 활동도 오래했고 그래도 극장 짬밥이 상당한 사람이라 괜찮게 할 줄 알았는데 무슨 한국에서 맨날 교향곡만 하고 오페라 한번 지휘 안해본 사람 같았다. 레치타티보는 딱딱하고 아무런 맛도 없었고 포르티시모가 나와도 조금도 흥분시키지 못 했다. 도대체 저 사람은 지휘대에 서서 뭘 하고 있는 걸까?? 2막 2장 피날레에서 갈등이 최고로 치닫는 순간에도 관습적인 알라르간도 정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베르디의 극적 재미를 적극적으로 거세하고 있는 수준이다. 오케스트라는 1막 시작부터 망조가 느껴졌다. 이 근본없는 오케스트라는 도대체 뭐지? 아니 왜 음정이 벌써부터 막 쪼개져?? 베르디인데 박자 좀 맞춰주면 안될까??? 

 

찰스 카스트로노보는 내가 영상물에서 몇번 보고 괜찮은 가수라고 좋아했는데 실연에서 들으니 영 딴판이다. 1막에서는 도대체 사랑을 고백하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게 소리를 내지르기만 했다. 그나마 2막 3막 오면서 조금 낫긴 했지만 기대했던 것에는 크게 못미쳤다. 그나마 비올레타와 조르조가 잘해주었기에 망정이지. 하지만 조역들은 또 수준 미달이었다. 서로 성량 대결하려고 나온건지 말하듯 처리해야하는 장면을 한음한음 또박또박 크게 내고 있질 않나… 알프레도와 비올레타 모두 자기 아리아에서 마지막 고음 불러보겠다고 한참을 빼먹고 그냥 쉬던데 그런거 너무 보기 싫다. 뭐 마지막 음을 짜릿하게 잘 부르면 말을 안 해요..

 

여기서 지휘 못지 않게 미국의 끔찍함을 보여준건 바로 연출이었다. 연출이 마르타 도밍고라는 걸 들었을 때 도밍고 딸인가 했는데 도밍고 부인이더라. 누가 봐도 오페라단 총감독인 도밍고가 꽂아준게 뻔한데. 헬조선에선 부인을 드라마투르그로 쓰지만 천조국에선 가족을 꽂는 스케일도 다르다. 

 

마르타 도밍고의 연출은 반짝이는 쓰레기였다. 재활용 불가임. 하루빨리 폐기처분하는 게 지구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미국인들이 꺼뻑 죽는 개츠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건 그럴 수 있다고 하자. 문제는 작품의 내용과 메세지에 대한 고민이 눈꼽만큼도 없이 그저 의미없이 화려한 볼거리로만 채워넣었다는 것이다.

1부에서 비올레타는 고급 세단을 타고 무대위에 등장한다. 미국 사람들은 왜그렇게 무대위에 차를 올리고 싶어 환장하는지 모르겠다. 일상 생활에서 맨날 보는 걸 꼭 무대 위에 올려놔서 무대 제작비 많이썼다고 광고하고 싶을까? 백번 양보해서 무대에 세단을 등장시키는 건 시각적, 그리고 연출적 돈지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차가 도대체 왜 왼쪽에서 등장했는데 무대를 가로질러 오른쪽으로 퇴장해야하는건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모든 관객의 시선을 그렇게 강탈하고 싶었나?

 

동선이 멍청하고 아무런 생각없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건 그러려니 한다. 나도 그런 연출 한국에서 많이 봐서 익숙하다. 그런데 이 마르타 도밍고의 연출은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좀더 적극적으로 작품을 망치기로 한다. 예를들어 2막 2장 파티장면에서는 30분 내내 아주 큰 미러볼에 조명을 쏴대서 관객들의 망막을 공격한다. 처음 5분 정도 하다 말겠지했는데 그냥 계속 그렇게 빛을 쏘아댄다. 음악이 어떻게 흘러가든, 알프레도랑 비올레타 둘만 나와서 다툼을 하던 말던, 미러볼은 꿋꿋했다. 미러볼을 30분 내내 쓰겠다는데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정말 진심으로?

저게 바로 문제의 그 미러볼

의미없는 동선은 계속됐다. 예를 들어 2막 2장에서 알프레도가 사람들을 부르기도 전에 이미 사람들이 뛰쳐 나오고 있다든지, 3막에서 알프레도가 Parigi o cara를 부를 때 공허하게 비올레타의 침대를 한바퀴 돈다든지, 조르조는 등장해서 벌서듯이 차렷자세로 노래를 하고 있다든지.  2막 파티장면에서는 역시나 예상대로 여자 무용수들 노출 시켜가며 무대를 채우는데, 저렇게 별 의미도 없는 장면 볼거면 그냥 스트립쇼에 가겠지 왜 오페라극장을 오겠습니까…

 

여기에 관객들 문화도 확실히 달랐다. 일명 메트 박수라고 부르는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박수들. 비올레타 입장할 때 박수.. 커튼 올라가고 나서 무대가 예쁘면 (돈을 많이 바른 티가 나면) 또 박수. 2막에 흩뿌려진 낙엽이 너무 예쁘다고 또 탄성. 정말 리액션 부자들이다. 뭐 박수 많이 치는거 정도야 차라리 문화의 차이라 할 수 있지만, 불꺼지고 오페라 시작할때 오케스트라가 전주곡 연주한지 20초 쯤 지나야 완전히 조용해지는 건 좀 심하지 않나? 그 20초 동안 스몰톡 마저 끝내느라 바쁜가. 객석이 이렇게 소란스러운 건 중국 말고 본적이 없다. 막 내려가기 시작하면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고 있던말던 박수치는 건 당연하다.

관객들이 얼마나 작품에 익숙한지 아는 기준 중 하나가 극중에 등장하는 유머 대사에 사람들이 얼마나 반응하는지이다. 극에 익숙하지 않고 리액션 많은 관객 덕택에 메트에서는 부파 신의 가호가 있는 거 아니겠는가. 하지만 춘희 같은 작품에선 좀 다르게 작용했다. 3막에서 비올레타가 의사에게 “하얀 거짓말은 의사들의 특권이죠”라는 말을 했을 때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어… 그러니까 지금 주인공이 죽어가면서, 자기가 곧 죽을 걸 알고 있다는 대사에서 웃고 있는거죠?? 도대체 어디가 웃긴거지 내가 이상한건가… 지금 생각해보니 조커의 나라는 역시 달랐던 건가보다.

 

3막 시작할 때 무대에 비올레타 침대만 하나 덜렁 놓여있는 건 그나마 이 연출에서 제일 무난한 선택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더니 뒤에 앉아있던 한 관객이 “Oh it’s too minimal to me” 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지금까지 봤던 무대가 too maximal하다는 생각은 안해봤어요..?? 하… 콘비츠니가 무대에 커튼이랑 의자 하나만 놓고 두시간을 완성한 춘희를 보고 오셔야 아 이게 미니멀이구나 할 테지 말인데.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공연 끝나고 폭풍기립 박수는 디폴트였다. 

 

 

종합하자면 이 공연 퀄리티는… 뭐랄까 학살카 같은 정도? 음 차라리 진부한 아이디어지만 아이디어라는 게 존재하기라도 하던 학살카가 생각이라는게 없는 이것보단 나을지도? 이런 공연을 20만원 주고 봐야하는 LA 관객들이 좀 불쌍해지다가도 여기는 돈 많이 벌어서 괜찮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날 공연은 아마 엘에이 오페라 한 시즌을 통틀어서도 가장 최악의 공연이었을 거다. 코미셰 오퍼 마술 피리나 맥비커 연출 같은 것도 올리는데 왜 나만 마르타 도밍고죠???? 어째서 왜 어째서??

 

연출만 구린게 아니라 지휘자랑 오케스트라도 구린데다가 관객 매너 역시 우리나라에 비할 수준이 안될 만큼 실망스러웠다. 그냥 여기는 오페라랑 안 맞는 나라다, 이게 내 결론이다. 실리콘 밸리 가면 겨우 이런 오페라나 봐야한다니, 난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실리콘 밸리는 안 가야겠다. 절대 불러주는 곳이 없는게 아니라 오페라 수준이 구려서 안. 가.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