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고두노프 예습 3. 블루레이로 나온 것이 두 개 뿐이라 이제 DVD로 넘어왔다. 

참고로 위 영상은 1978년 영상으로 1987년 영상과 같은 프로덕션에 주역 가수도 많이 겹치지만 평은 1978이 더 좋은 듯 하다. 보리스 역 가수 예브게니 네스테렌코Evgeny Nesterenko 노화도 있었고, 의상과 무대 역시 노화됐다고 한다. 의상과 무대의 노화라니..... 


볼쇼이에서 공연하는 보리스 고두노프. 핀란드 지휘자가 지휘하는 시벨리우스라면 자국 버프라든지, 본토 음악이라든지 같은 기대를 하기 마련이다. 오페라의 경우는 여기에 최소 가수들의 네이티브 어드밴티지가 추가된다. 하지만 모든 출연진과 제작진이 러시아 인이라면 뭔가 더 대단한 걸 기대하게 된다. 디아블로에서도 세트 아이템 다 맞추면 각각은 최고의 템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주 좋은 효과를 내는 것 처럼 말이다. 


폐쇄적인 공산권 집단일 수록 그 실력에 대한 기대가 이상한 기대가 생기기 마련이다. 간혹 들려오는 '북한 오케스트라가 그렇게 잘한다더라'와 같은 것 말이다. 야구로 치면 쿠바 아마 야구가 있을 테다. 과연 소비에트의 오페라는 어떤 수준일까. 그리고 기대했던 '세트 효과'는 과연 실재할 것인가.


무소륵스키는 보리스 고두노프를 쓰며 당시 황실 극장이었던 마린스키의 뛰어난 가수진을 생각하며 썼을 것이다. 러시아 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러시아적 발성을 낼 수 있으며 마린스키나 볼쇼이 처럼 거대한 극장을 채울 수 있는 가수들 말이다. 굳이 19세기 오페라 가수의 발성과 21세기의 그것을 비교할 필요도 없이, 이 정도로 러시아 적인 가수를 한 부대 불러온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1978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의 공연은 러시아 가수라는 것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건 바이에른 영상에 나왔던 마르쿠스 아이헤나 게르하르트 지겔과 같은 잘 나가는 바그너 가수가 따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단순히 딕션의 문제가 아니라 목소리에 실려있는 야성적인 힘에서부터 큰 차이가 난다.  그건 우리가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의 차이콥스키를 떠올릴 때 생각하는 소름끼치도록 작렬, 혹은 작열하는 금관의 소리와 닮아있고 얼마전 참담한 비극을 맞았던 붉은 군대 합창단을 떠올릴 때 생각하는 압도적인 소리다. 슈이스키 공, 셸칼로프는 물론 니키티치 같은 역 까지 그렇게 강렬한 소리를 낸다.


그 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건 단연 드미트리 역의 블라디슬라프 피압코Vladislav Piavko다. 

이 쯤 되면 쏘련의 자랑스런 예술가 아닙니까. 드미트리가 그저그런 찌질한 역할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간지의 폭풍을 뿜어준다. 역시 가수는 노래만 잘부르면 일단 장땡이다. 약간은 바보같은 표정이지만 너무나 쉽게 대포같은 소리를 내지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진짜 얘가 러시아의 구원자여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오오오 드미트리

읽는 분들이 뭘 좋아할 지 몰라서 여러개 준비해봤다.

외부 링크가 막혀있지만, 팔리아치 의상을 입어라 장면이다. 비브라토가 많이 들어간 게 내 스타일이 아니지만 목소리에 담긴 힘은 압도적이다.

러시아어 버전의 카르멘 꽃 노래

오텔로도 자주 불렀나 보다. 오텔로의 죽음 장면 92년 영상.

대체로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노래들이지만 드라마티코 테너의 역할이 말 그대로 드라마틱한 감정을 끄집어내는 데 있다면 피압코는 정말 최고의 드라마티코 테너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사실 그 전까지 피멘과 드미트리의 수도원 장면이 좀 지루하다고 생각했는데 드미트리가 듣는 사람의 멱살을 잡고 귀청을 후드려패기 때문에 정신을 팔 수가 없다.


연출은 정말 옛날 스타일이지만 연극적인 힘이 분명하다. 모든 가수들이 보리스 고두노프 한 두번 불러본 솜씨가 아니며 샬리아핀의 후예 답게 연기가 부족한 느낌이 없다. 간혹 너무 과장되거나 인위적인 제스처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노래를 잘 부르니 설득이 된다. 그냥 평범한 드미트리가 노래 부르면서 팔을 뻗으면 바보같아 보이겠지만 저런 목소리로 팔을 뻗으면 당장이라도 무릎 꿇고 절해야할 것 같은 분위기.


여기에 의상들의 퀄리티 역시 뛰어나다. 전통적인 연출로 갈 때의 장점이 한껏 살아있다. 예전 엠티티의 스트라빈스키 다큐에서 마린스키 극장의 의상들을 보여주면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야 볼 수 있는 장식들까지 섬세하게 장식돼있다고 설명하는 대목이 있었다. 이 영상에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보리스의 의상은 매번 바뀌지만 그 디테일이 완벽하게 살아있다. 아마 박물관에 전시해놔도 속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면 진짜 박물관에서 꺼내온 거라든가.. 

이런 디테일은 '가성비'라는 이름으로는 절대 설명될 수 없다. 어쩌면 소비에트 시절, 혹은 더 오래 전의 러시아에서는 오페라를 만들 때 가성비 따위란 걸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이걸 누가 본다고 열심히 만드나"라는 게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인 분위기로서 오페라를 제작했던 걸지도 모르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알렉산더 라자레프Alexander Lazarev의 지휘는 대체로 몰아치는 템포였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1908년 판본을 사용하는데 디테일이 잘 살아있다든가 아주 폭발적이라는 느낌은 아니고 무난한 편.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판본은 폴란드 막 중 첫번째 장을 삭제했으며 크렘린 광장 장면과 크로미 숲을 모두 사용한 버전으로 대신 마지막은 보리스의 죽음으로 끝난다. 무소륵스키의 원본은 대체로 심심하며 아주 절제된 형태의 관현악법을 사용하는데 림스키코르사코프 판본은 작품이 좀 오페라 답게 들리도록 만든다. 딱히 악보를 붙잡고 듣는 게 아니더라도 원본만 듣다가 림코 판본을 들으면 차이점이 상당히 분명하게 느껴진다. 다소 투박하며 여백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원본에 비해 림코 판본은 더 극적이며 풍성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림코 판본은 서유럽 보다 오히려 러시아에서 더 인기 있는 편이었는데, 보리스 고두노프를 밥 먹듯이 듣는 러시아 입장과 일종의 별미 처럼 즐기는 서유럽의 관점이 이런 유행의 선택에 영향이 있었을 것 같다. 


잠깐 관객 이야기를 하자면 이 곳에서도 커튼이 움직일 때마다 나오는 '메트 박수'를 들을 수 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건 말건 커튼이 닫히기 시작하면 박수를 친다. 막이 열릴 때도 마찬가지로 무대가 드러날 때 또 박수를 친다. 아리아라고 할 게 별로 없는 이 오페라에서도 기회만 나면 박수를 열심히 친다. 보리스의 마지막 모놀로그가 끝나고 쓰러져 죽을 때도 박수를 친다. 뭐 노래 잘 부른 가수에게 박수를 치는 건 그럴 수 있지만 사람이 죽는 장면에서 박수치는 건 좀 그렇지 않나ㅋㅋㅋㅋ 저 장면에서 칼같이 박수를 치는 관객이라면 오잘알 일텐데 그런 사람들부터 나서서 박수를 쳤을 걸 생각하면 참 재밌는 일이다.


보면 볼 수록 보리스 고두노프에는 수수께끼 같은 것들이 많다. 도대체 왜 러시아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 열광할까? 작품의 중심 플롯은 보리스가 차르로 추대되었다가 자신이 살해한 어린 아이의 망령에 의해 죽어간다는 점이다. 자신의 범죄가 타인에 의해 발각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죄의식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는 건 러시아 문학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코드다. 가장 대표적인 <죄와 벌>은 물론이고, 오페라만 따지더라도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차르의 신부>가 있고, 체코 오페라지만 이런 죄의식이 작품의 핵심인 <카탸 카바노바> 역시 러시아 작가 오스트롭스키의 <뇌우>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런 연장선에서 이해해보려고 하더라도 몇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 플롯에서 중요한 소재인 그 범죄 행위가 극 중에서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사건은 오로지 피멘의 모놀로그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앞선 글에서 말했 듯이 이런 점에서 보리스 고두노프는 바그너의 작품과 맞닿는다. 하지만 바그너의 경우에서 구술로 설명되는 사건의 비중이 과연 보리스 고두노프의 드미트리 살해 만큼 중요한 것이냐 묻는다면 그렇다 라고 대답하기도 어려운 문제다. 로엔그린에서 고트프리트 실종, 파르지팔에서 암포르타스의 삽질이 이야기의 시작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결말까지 정해주는 사건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보리스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작품에서 등장하지 않는 그 사건 때문에 괴로워 한다.

보리스의 파멸을 이끄는 드미트리 참칭자의 플롯이 엮이는 구성 역시 분명 일반적이지 않다. 두 개의 플롯은 결국 서로 만나지 못한다. 복수의 칼날을 간 막두프가 막베토의 머리를 자르는 일이 빠져있는 것이다. 두 플롯은 분명히 같은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지만 서로 너무나 독립돼있다. 누군가 보리스의 이야기를 빼고 드미트리의 이야기만 엮더라도 하나의 오페라가 될 것이고 드미트리의 이야기를 빼고 보리스의 이야기만 엮어도 대충 이야기가 될 것이다. 드미트리의 이야기를 본 뒤 보리스의 이야기를 볼 때 두 플롯을 연결지어 보리스의 감정 상태에 이입하는 것은 순전히 관객의 몫으로 남겨져있다. 둘 플롯은 마치 이중나선 마냥 서로 만나지 않지만 꼬여있다.


앞으로 예습해야할 디비디가 꽤나 남아있기 때문에 작품 이야기를 할 시간은 더 있을 것 같다. 다만 역시 모든 글의 결론은  국립오페라단을 까야 제맛 아니겠는가. 

예습을 해갈 수록 이번 국립오페라단 보리스 고두노프가 성공하지 못 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생긴다. 불어 딕션도 대차게 말아먹는 국립오페라단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캐스팅했을까. 

일단 국립오페라단이 과연 이 작품의 배역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긴 한 건지 의심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보리스 고두노프 역에만 올인 해서 캐스팅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리 역의 테너 신상근Andrea Shin은 독일 칼스루에 전속을 거쳐 하노버 전속 까지 꿰찬 가수이지만 프로필에 적힌 러시아 레퍼토리는 그리고리 하나 뿐이다. 여기에 평소에 바그너를 부른 것도 아니고 알프레도나 공작 같은 역을 주로 소화했던 가수가 과연 그리고리를 얼마나 소화해낼 수 있을까? 그것도 폴란드 막이 추가된 판본에서 말이다.

피멘 역을 맡은 가수는 러시아 오페라를 한 번이라도 공연한 적이 있는지 궁금할 정도다. 1막과 4막에서 피멘의 역할은 구르네만츠에 비할만 하다. 국내에서 이름난 가수도 아니고, 국오 토스카에서 샤로네 정도를 맡은 가수에게 피멘을 맡긴다니. 

멍청하게 Shchelkalov를 슈첼칼로프라고 해놓질 않나, 지휘자 이름 스타니슬라 콘차스키는 스타니슬라 콘차노스키라고 반대로 써놓질 않나. 

또 하나 황당한 건 캐스팅에 유로디비(yurodivy, simpleton, 백치, 성 바보)가 안 보인다는 거다. 극에서 두번이나 등장하고, 무소륵스키가 한 장을 통째로 날려먹을 때도 살려냈던 캐릭터가 캐스팅 목록에 없다. 많게는 두 번이나 등장하는 인물인데? 아무리 판본이 다양하다지만 설마 진짜 짤랐어??? 



다시 돌아와서 요약: 러시아 오페라용 세트 아이템 '소련의 볼쇼이 세트'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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