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을 보고 발레의 아름다움을 깨우쳤습니다.


글린카는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작곡가며 대표작인 <루슬란과 류드밀라>와 <차르의 일생>이 러시아 오페라의 시작이라는 점 역시 잘 알려져있다. 러시아 오페라를 파보면서 결국 글린카를 넘길 수는 없을 것 같아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한번 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예전에 오케스트라에서 루슬란과 류드밀라 서곡을 연주할 때 작품을 봐보려고 했지만 오알못이던 나에게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이었지만, 내가 그 때 이 작품을 봤다면 몇 년간 러시아 오페라에는 손도 안 댔을 테니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루슬란과 류드밀라 서곡은 심심하면 연주하는 곡 중 하나로 국내외 오케스트라가 신기할 만큼 차6을 자주 연주하던 2008년, 내가 공연장에서 가장 많이 들은 서곡이기도 하다. 서곡의 쌈빡한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이 오페라가 어떤 좌충우돌 모험기를 그리고 있을 지 기대하게 만든다. 


그런 거 없다. 서곡이 끝나고 나오는 음악에서부터 난 뭔가 잘못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서곡에서부터 알아차려야했는데. 이 오페라의 리듬과 선율이 얼마나 단조로운지 말이다. 오페라 내내 아주 심각하게 단조롭다. 그리고 서곡에서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았다는 듯 오페라는 대체로 느린 노래로 점철돼있다. 간혹 카발레타 처럼 빠른 노래도 나오지만 그것 마저 상당히 단조롭다. 서곡에서 비올라와 첼로가 연주하는 2주제 멜로디가 루슬란의 2막에 나오는 카발레타의 일부다. 그러니까 서곡에서는 '느리고 서정적인 노래'가 오페라 본막에서는 '빠르고 경쾌한 노래'에 속한다는 것이다. 거기다 각각의 아리아는 얼마나 길던지. 한번 노래하면 10분도 그냥 넘긴다. 물론 벨 칸토에서 카바티나와 카발레타를 포함하면 저 정도 길이는 나올 수 있지만 그 둘은 그래도 분위기라도 확실하게 다르지. 글린카는 친절하게 느린 노래 두 개를 병치시킨다.


리브레토를 깔 것도 없다. 물론 리브레토도 병맛이 상당히 넘쳐나긴 하지만 이 리브레토도 시간 배분을 잘 했다면 괜찮은 작품이 될 수 있었을 테다. 작품을 보면서 글린카가 작품의 공연 시간에 비례해서 보수를 받았던 건 아닐지 궁금해졌다. 빠른 곡은 음표 적기가 귀찮으니까 느린 곡을 끝도 없이 반복시켜서 오페라 시간만 채웠던 건 아닐까. 빠른 부분이 안나오는 건 아니다. 그냥 느린 부분과 빠른 부분의 음표 갯수나 마디 수를 똑같이 맞추는게 목표였는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린다는 거지. 여기에 뭔가 딱딱하고 투박하고 단순한 리듬구조로 인해 답답한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여기에 노래가 아주 잘 짜여있다거나 차이콥스키 처럼 귀에 쏙쏙 박히는 선율이면 모르겠는데 안타깝게도 글린카는 차이콥스키보다 한참 전의 사람이다. 작품이 초연된 1840년대면 도니체티와 벨리니의 뒤를 잇는 셈인데 그런 벨 칸토 오페라를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이긴 하지만 선율이 대체로 도약 진행이 아니라 순차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벨리니보다 더 못 참겠는 오페라를 보게 되다니. 아 참고로 이 오페라가 3시간이 훌쩍 넘어서 더 빡쳤다.


오페라가 너무 지루한 나머지 발레가 나오는데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더라. 평소에 발레는 도대체 무슨 맛으로 보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이 오페라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아 발레가 이렇게 흥미로운 예술이었다니! 차라리 내가 보고 있는 이 작품이 오페라가 아니라 발레 작품이길 간절히 바랄 정도였다. 물론 마린스키의 발레리나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걸 부정할 순 없겠지만, 음악과 발레가 상당히 잘 맞아떨어졌다. 그 동안 발레 작품을 보면서 음악이랑 발레가 너무 안 맞는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는데 이 공연에 나오는 발레는 정말 음악의 묘사와 발레의 몸짓이 하나되어 잘 어울렸다. 발레리나들 퇴장할 때 왜 그렇게 아쉽던지ㅜㅜ


그래도 의무감으로 줄거리를 한번 요약해보자면 이렇다. 루슬란과 류드밀라가 결혼하려는데 루슬란 말고 류드밀라를 노리는 남자가 두 명(A, B)있음.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고 류드밀라가 사라짐. 루슬란은 류드밀라 찾으러 여행을 떠나고 착한 마법사를 만나 도움을 받음. 루슬란이 악당을 처치할 수 있는 칼을 얻음. 류드밀라를 노리는 남자 A는 류드밀라를 찾다가 뜬금없이 자기 옛 연인과 만나는데 착한법사의 도움으로 둘이 다시 사랑하는 해피엔딩. 루슬란이 류드밀라를 구출하는데 류드밀라가 끝없는 잠에 빠져있음. 이 때 남자 B가 류드밀라를 훔쳐서 류드밀라 집으로 먼저 데리고 감. 루슬란이 또 법사한테 도움을 받아 류드밀라를 깨우는 걸로 끝. 결국 법사 엑스 마키나 


캐스팅이 아주 까다로운데, 저기 줄거리에 나오는 사람중 루슬란 (베이스), 류드밀라 (소프라노), 남자A(콘트랄토), 남자B(베이스), 남자A연인(소프라노), 법사(테너)가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여기에 마녀, 처음에 나오는 음유시인, 류드밀라 아빠 까지 끼어들면 좀 복잡해진다. 베이스와 바리톤 구별이 없던 때라 루슬란의 음역은 베이스의 저음과 바리톤의 고음을 넘나 들어야 한다. 리브레토가 복잡한 거나 인물들 아리아 비중이나 바로크 오페라와 꽤 닮아있는  편이다. 모페라에 비해 벨칸토 오페라 부터 대체로 주요 인물들의 역할 수가 줄어드는 편인데 글린카는 그런 거 없다. 이게 나중에 이어져서 보리스 고두노프 같은 작품이...


키로프 오페라를 정복한 게르기예프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다. 당시 나이 42세. 머리카락이 아직 꽤 남아있다!

인터뷰에서 서방 세계에 이렇게 위대한 작품을 널리 알릴 수 있다면서 기뻐한다. "너희 오페라 하우스엔 이런 거 없지?"라며 루슬란을 치켜 세우며 이 공연 영상이 서방에 방송되면 이제 이 작품이 러시아의 중요한 수출품이 될 거라며 자신하지만 현실은... 


이 작품에서 눈길을 끄는 건 단연 네트렙코다. 네트렙코의 최초 공식 영상물이 바로 이 루슬란과 류드밀라다. 당시 23, 24세 정도의 나이로 게르기예프가 전격 발탁했다. 게르기예프도 솔직해서 "류드밀라가 어리고 예뻐야 하니까 뽑았다"고 말한다.  



이 소프라노가 20년뒤 외모와 실력을 등가교환해서 전세계 오페라하우스를 씹어먹고 있을 거란 걸 과연 이 당시 사람들은 알았을까.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턱선이 살아있다. 

외모 버프가 있긴 하지만 아직 노래는 불안하다. 뭐 대학교 막 졸업했을 나이 아닌가. 고음도 메마르고, 음정도 불안하고, 음색도 윤기있는 소리가 잘 안나온다. 


그 외에 가수들이 전반적으로 모두 훌륭하다. 콘트랄토의 라리사 디아드코바Larissa DiadKova가 특히 훌륭하고 루슬란 역의 블라디미르 옥노벤코Vladimir Ognovenko도 뛰어나다. 




한시간 정도의 게르기예프 다큐가 들어있다. Catching up with Music 이라길래 루슬란 음악 설명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냥 게르기예프 본인 다큐더라.

중간에 나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콘서바토리의 전설적인 지휘과 교수 일리야 무신. 

게르기예프, 비쉬코프, 그리고 쿠렌치스!의 스승이기도 하다.


다큐에 나오는 게르기예프 젊었을 때 사진.


키로프 오페라 오케스트라 단원이 180명, 합창단원 120명, 발레 200명, 테크니션 300명, 가수 80명 정도가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제일 웃겼던 장면은 게르기예프가 "아 나도 공연 적게 하고 싶다. 내가 연간 20회만 공연해도 키로프가 괜찮으면 그렇게 하고싶다. 하지만 현실은 80회는 해야한다. 내 인생의 목표는 공연 횟수는 줄이고 공연 질을 올리는 것(less in numbers, more in quality)이다" 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랬던 분의 현재 스케줄 상태가...?

그래도 게르기예프의 어린 시절부터 조명하며 키로프 오페라 감독 자리의 어려움 까지 잘 설명해준 다큐다. 보다보면 은근히 게르기예프한테 정든다. 특히 후반부에 온갖 오페라 음악을 교차시켜가며 게르기예프의 바쁜 공연 일정을 보여주는 장면은 다큐 감독이 음악에 상당히 일가견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명장면이었다.




요약: 유롭스키가 최근에 볼쇼이와 루슬란을 한 게 DVD로 나왔다던데 내가 그걸 보려면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남는 게 있다면 러시아 오페라가 참 긴 발전의 시간을 거쳐왔구나라는 걸 깨달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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