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오페라 포인트: 벨리니를 즐기고 싶다면 글린카 다음에 본다.


글린카를 보면서 여지껏 경험해보지 못한 지루함을 느끼고 이 기세라면 뭘 봐도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 때다.  벨리니! 벨리니를 보자!


벨리니 삼대장 청교도, 몽유병, 노르마 중 리브레토가 가장 정상적인 게 노르마고 음악 역시 노르마가 그나마 취향에 맞는 편이다. 일단 노르마는 깔끔하게 두 주인공이 함께 죽지 않는가. 역시 오페라는 사람이 죽어야 제맛이다. 두 문명의 대립, 금지된 사랑, 삼각관계 등 막장드라마 필수요소가 착실하게 등장한다는 것도 포인트. 특히 노르마와 아달지사의 관계는 여느 오페라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애증의 관계라 더욱 흥미롭다. 처음 노르마를 본 게 비온디 지휘의 영상이었는데 비온디의 반주가 맛깔나서 더 재밌게 들었다.


글린카 다음에 벨리니를 듣는 건 상당한 대조를 이뤘다. 글린카가 이탈리아에서 벨리니와 도니체티의 벨 칸토 오페라를 접하고 러시아로 돌아와서 남긴 작품이 <차르의 생애>와 <루슬란과 류드밀라>니 글린카가 얼마나 독자적인 음악을 했는지 실감하려면 당시의 벨 칸토 오페라를 듣는 것 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벨리니의 작품에서는 너무나 친숙한 음악적 이디엄들이 쏟아진다. 내가 벨리니를 지루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들었을 때 노래의 선율이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 노래가 어떤 식으로 반복될 것인지를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의 반주 패턴은 언제나 분명하고 일정하며 조성 역시 확실하다. 내가 글린카의 음악에서 어색하게 느꼈던 것 중 하나는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익숙하지 않은 화성의 색채였던 것 같다.


벨리니를 듣고 있으면 선율다운 선율이 등장하고 각각의 노래는 균형잡힌 프레이즈로 구성돼있다는 게 분명히 나타난다.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는 비교적 명확히 구분되어있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선율의 싱코페이션은 오페라에 생기를 부여해준다. 오케스트라의 정형화된 반주 음형은 벨리니 뿐만 아니라 로시니, 도니체티, 좀 더 넓게는 베르디의 작품에서도 등장하는 것들이다. 글린카를 듣고나서 벨리니를 들으니 뻔하다고 싫어했던 그 정형화된 틀이 내가 오페라를 즐겁게 들을 수 있었던 특징들이라는 걸 실감했다.



공연 이야기로 넘어가자. 이 노르마의 공연 퀄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극찬을 몇군데서 봤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대가 생겼다. 뭐 아무리 잘 해봤자 벨리니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주역 트리오로 손드라 라드바놉스키Sondra Radvanovsky, 그레고리 쿤드Gregory Kunde, 예카테리나 구바노바Ekaterina Gubanova가 출연한다. 쿤드와 구바노바는 서울시향 공연 때도 왔던 가수들이라 한국 팬들에게도 친숙한 이름일 테다. 쿤드의 경우 세비야에서 오텔로를 본 적이 있었다. 


라드바놉스키는 비브라토가 심한 편이고 프레이징이 안정되게 가는 게 아니라 처음 소리를 천천히 내다가 밀어서 커졌다가 다시 줄어들었다가를 반복해서 피곤한 스타일이었다.

이게 트릴이야 비브라토야....

도대체 왜 이런 가수가 좋다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다고 생각할 즈음에, 고음을 듣고 조금 수긍이 갔다. 이상하게 고음일 수록 소리가 더 안정적이더라. 발성이 고음에 특화돼있는 듯. 고음이 꽉 차서 아름답게 울린다는 느낌을 주는데 직접 공연장에서 들었던 사람이라면 상당한 쾌감을 느꼈을 테다. 어차피 뭐 벨 칸토 오페라는 그냥 가수가 고음 부르는 거 들으러 가는 거 아닌가요. 다른 거 다 말아먹어도 고음 하나만 잘 뽑으면 장땡이겠지. 메트에서도 도니체티 여왕 삼부작 주연 다 맡고 이것저것 많이 부르는 것 같은데, 요즘 메트 공연을 보고 있으면  "믿고 거르는 메트"라는 말이 슬슬 나올법도 하지 말이다. 생각해보니 거긴 원래 르네 플레밍이 짱먹는 곳이었잖아? 


쿤드는 목소리의 음색이 독특한 가수지만 딱히 매력적인 가수는 아니다. 로시니 오텔로와 베르디 오텔로를 모두 소화해낼 수 있다는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아이고 쓸모없다. 드라마티코를 맡으려면 단단한 목소리가 있어야하는데 단단함은 빼고 거칠며 허스키한 음색으로 승부하는 느낌이다. 

예카테리나 구바노바는 훌륭한 딕션과 표현력, 그리고 안정적인 발성을 갖췄다. 음색이 특별한 메조는 아니지만 모범적이다. 이런 가수가 서울시향이랑 브랑게네를 부르고 대지의 노래를 불렀던 때가 있었지 말입니다.


레나토 팔룸보Renato Palumbo의 지휘는 상당히 괜찮다. 눈에 띄는 트릭을 쓰지 않고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게 극을 이끌어나간다. 연륜있는 오페라 지휘자 답게 곳곳에서 나오는 루바토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갈리아 인들이 분노할 때 나오는 음악의 경우 사정없이 휘몰아치며 분위기를 바꿔주는 능력도 탁월했다. 


케빈 뉴베리Kevin Newbury의 연출은 딱 미국스럽다. 딱 보는 순간 이거 메트 연출 아닌가 싶을 정도의 인상을 준다. 아닌 게 아니라 부클릿에도 "이 편지는연출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하여 바르셀로나를 돌아 시카고와 토론토로...." 라는 말이나온다.  살짝 판타지스러운 갈리아 족의 복장과 조금 비현실적인 폴리오네의 복장은 시대를 특정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왕좌의 게임 닮았다"라는 소리도 들었는데 글쎄... 무대 바뀌는 것도 별로 없고 애꿎은 무대 뒤에 벽만 들었다 놨다 한다. 뭐 그런 포인트들이 극의 중요한 데 적절하게 잘 나타나고 있긴 하지만 그냥 별생각 없이 보기 좋다.


카메라 편집을 엄청나게 많이했다. 1막의 폴리오네 아리아에서는 진짜 공연 몇개를 합쳐논 건지 궁금할 정도. 다른 오페라 영상을 보면서도 앵글 바뀔 때 짜깁기한 티가 나기 마련이지만 이건 좀 심했다 싶을 정도. 아니 고음 나오기 직전에 자세 다른 영상을 틀어주면 어쩌자는 거야 ㅋㅋㅋㅋ 심지어 노래 끝나고 박수 받는 타이밍에 바뀌는 영상도 자세가 다르다. 쿤드 노래 퀄리티도 들쭉날쭉하고 촬영 퀄리티도 들쭉날쭉 했나보다. 그래도 최신 영상이라 그런지 카메라 좋은게 확 티가 난다.



글린카 다음에 본 거라 괜찮았지만, 대단한 공연까진 아니다. 21세기에 노르마가 쉽지 않다곤 하지만, 이게 최선이라면 좀 슬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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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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