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 빌 결혼시키기.


파파노가 안토넨코를 데리고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Cav/Pag의 더블빌에 도전했다. 이 작품의 레퍼런스 영상에 도전해볼 법도 한 조합이지만 안타깝게도 틸레만과 카우프만의 자리를 넘보긴 어려워 보인다. 


두 작품이 더블 빌로 한 저녁에 처음 공연된 것은 1893년 4월 2일 트리에스테의 극장에서였다. 그 뒤 돈 냄새를 귀신 같이 맡은 메트가 같은 해 12월 22일 이 더블 빌을 미국 초연하였고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1894년에 처음 공연하였다. 카발레리아나 팔리아치나 다른 작품과 함께 공연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여전히 두 작품을 함께 공연하는 게 가장 일반적이다. 부클릿에 따르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커플링된 작품으로는 베르디의 <아이다>, 메노티의 <무도회의 아멜리아>, 슈트라우스 <살로메>, 파야 <허무한 인생>을 비롯하여 발레로는 스트라빈스키 <페트루슈카>, 라벨 <라 발스>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아이다랑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하루에 공연했다고요...?? 팔리아치와 커플링된 오페라로는 글룩의 <오르페오>, 비제의 <자밀레Djamile>, 그리고 푸치니의 <외투>가 있다.


뭐 이제 두 작품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결혼 100주년을 가뿐히 넘은 부부다. 이 둘은 베리스모의 전형적인 플롯을 공통적으로 갖지만, 시칠리아의 종교적인 장면과 광대들의 극중극은 분명한 대비를 이루기도 한다. 두 작품이 함께 공연되는 건 너무 당연하여 가끔 둘을 한 작품으로 인식하여 서로의 차이를 깜빡 잊기도 한다.


이 프로덕션의 연출가 다미아노 미키엘레토는 이 작품이 함께 공연되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싶었나보다. 그리고 이건 득보다 실에 가까운 결과를 낳았다.


두 작품을 하나의 작품으로 엮으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흔하게 있었다. 테아트로 레알의 프로덕션에서 잔카를로 델 모나코는 팔리아치의 프롤로고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앞에 두었다. 이 프롤로고야 말로 일종의 "베리스모 선언"이니 이걸 맨 앞에 둠으로써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팔리아치의 베리스모적 공통점을 강조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엮겠다는 의도였다. 그리고는 팔리아치가 시작할 때 투리두의 시체가 있는 대리석이 무대를 지나가는 장면을 넣었다. 잘츠부르크의 슈퇼츨의 연출도 비슷한데, 팔리아치를 시작할 때 주인공들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연기하다 돌아와서 쉬는 것 처럼 표현했다. 


이 정도가 적당했다. 하지만 미키엘레토는 두 작품을 어떻게든 한 몸으로 섞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있었나보다. 두 작품이 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 네다가 등장해 팔리아치 포스터를 붙이고 다니고, 그 모습을 본 실비오가 네다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을 넣은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합창 장면에 이렇게 극의 진행이 생기는 장면을 넣는 건 극에 생동감을 넣을 수 있는 연출 방법이다. 문제는 여기서 한발짝 더 나가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을 건든다는 것이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 마스카니의 대표작이자 오페라 역사 상 가장 유명한 간주곡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작품이다. 극 중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이 등장하는 건 무슨 의미일까.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무대에 산투차를 올려놓으면 그의 슬픔과 곡의 아름다움이 대비되어 눈물을 자아낼 것이고, 아무것도 없어도 한 때 사랑하던 연인을 떠올릴 수도 있을 테다.


미키엘레토는 이 장면을 실비오가 네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으로 바꿔놓는다. 장면 자체는 정말 아름답다. 후술하겠지만 카르멘 잔나타시오의 분장과 연기는 정말로 영화 속의 인물을 보는 것 같고, 자신을 찾아와 빵을 사가는 네다를 쫓아가는 실비오의 모습도 현실적으로 아름답다. 네다와 실비오의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이 무대 위에서 보여진 만큼 이 둘의 듀엣은 더 큰 감동을 줄 테다.


문제는 과연 이렇게 극의 흐름의 한 가운데 존재하는 작품을 팔리아치를 위해 써버려도 되냐는 것이다. 투리두는 산투차를 버리고 롤라에게로 떠나고, 산투차는 알피오한테 고자질하고 알피오는 부들부들 하는 폭풍의 한 가운데, 저렇게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해도 되냐는 거다. 뭐 이런 정신없는 아침드라마가 휘몰아치는 장소에서 순수한 사랑이 꽃피고 있다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수도 있나. 하지만 그러기에는 산투차랑 맘마 루차가 너무 불쌍하다. 간주곡은 산투차가 등장할 수 있는 마지막 장면이란 말이다. 제일 중요한 순간에 산투차가 사라졌어....


여기서 끝났으면, 뭐 카발레리아를 내주고 팔리아치를 취한다 라는 전략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팔리아치를 보면 그것도 아니다. 산투차의 분량을 날려먹은 게 미안해서인지, 보상 판정으로 팔리아치 간주곡을 산투차와 맘마 루차한테 내준다. 네?!

카니오가 의상을 입어라를 멋있게 불러젖힌 다음에, 간주곡에서는 공연장에 찾아온 산투차와 맘마 루차가 나타난다. 팔리아치 간주곡은 둘이 슬퍼하며 서로를 위로해주는 장면으로 채워진다.


이 순간 벙 찌더라.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수학 시간에 국어 공부하고 국어 시간에 수학 공부하는 학생"이란 말인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에 네다와 실비오를 등장시킨 건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째서 이 순간 말도 안되게 아름다운 음악이 나올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독특한 해답이 될 수도 있지만, 도대체 팔리아치에 산투차를 끌어들일 건 뭐란 말이냐. 산투차 한풀이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서 해줬어야지! 왜 애꿎은 카브 간주곡을 팔아넘기고 뜬금없이 팔리아치 간주곡을 주냐고. 야구로 치면 역전 기회 만루 상황에서 바깥쪽 볼을 스트라이크로 잡아줘서 삼진아웃 먹게 만든 다음에 보상판정으로 9회 2사에 꿈도 희망도 없을 때 한 가운데 스트라이크를 볼넷으로 출루 시켜주는 기분이랄까. 거기다 그걸로 구원투수의 무사사구 연속이닝 신기록을 날려버리면 딱 이런 기분일 것 같다. 두 작품 결혼 시키랬더니 간주곡을 스와핑하냐.


이런 병크를 터뜨리지만 그래도 빛나는 장면이 있다. 바로 팔리아치의 극중극 장면이다. 팔리아치의 핵심이 바로 이 극중극이라고 하지만 여태 이 극중극을 괜찮게 표현한 경우를 별로 못봤다. 카니오가 등장하기 전까지 광대극이 너무 허접하고 긴장감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극중극의 상황이 극과 똑같다는 메타 상황 역시 작품을 계속 접할 수록 신선함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미키엘레토는 이 문제를 한큐에 해결한다. 바로 무대 뒤 카니오의 시선에서 이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다. 백스테이지에 있는 카니오에게 네다와 토니오의 환상이 나타나 노래를 부르며 그를 조롱한다. 압권은 카니오가 공연장에 들어가는 장면이다. 모든 관객들이 아를레키노가 쓴 것과 똑같은 가면을 쓰고 소름끼치게 카니오를 쳐다본다. 자기 부인의 정부가 누구인지 눈에 불을 키고 찾는 카니오 입장에서 모든 관객이 아를레키노로 보이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 극중극의 노래는 카니오를 대놓고 놀리며 조롱하는 심리적인 환상으로 변모한다. 이렇게 카니오의 관점에서 연출하니 이 작품이 정말 영락없는 NTR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마지막에 La comedia è finita는 카니오 대신 토니오가 불렀는데, NTR로 정신나간 카니오 보단 이를 관찰하며 조소하는 토니오가 부르는 게 더 어울리더라.


그 외에도 연출가의 재능이 빛나는 장면이 군데군데 있다. 특히 두 작품에서 등장하는 합창 시퀀스를 굉장히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서 투리두가 마을사람과 와인마시는 장면에서 판을 벌려 팔씨름을 하는 걸로 표현한다든가, 팔리아치 1막에서 광대들이 퇴장하고나서 마을사람들이 노래하는 장면을 마을회관에서 함께 노래와 연극을 연습하는 장면으로 표현한 장면이 좋았다.

여담이지만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무대가 빵집으로 돼있는데 마스카니가 빵집 아들로 태어났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 같다. 


회전무대는 양날의 칼이었다. 상당히 세련되게 활용된 부분도 있지만 너무 쓸데 없이 회전하는 장면이 너무 많았다. 또한 회전무대가 매우 사실적인 공간을 제공한 것에 비해 뒷배경을 의도적으로 황량하게 처리하여 실제도 아니고 가상도 아닌 이상한 공간이 된 점은 보기에 뭔가 불편했다. 이도저도 아닌 느낌이 조금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무대의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다는 걸 부정할 순 없다.

구도나 색감이 정말 뛰어나지 않는가. 


파파노의 지휘는 다행히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베리스모 못하는 파파노면 설 곳이 없죠. 이걸 못하면 탄핵 가야합니다. 다행히 파파노의 이탈리안 혈통은 어디 가질 않아서 틸레만의 지휘를 들을 때 종종 아쉬웠던 2%를 확실하게 채워준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음색은 놀랍도록 섹시하다. 여기에 질러줄 때 질러주며 폭발시키는 힘이 탁월하다. 폭발력 하면 또 파파노 아닙니까. 베리스모에서는 그렇게 좀 주체 못하고 흔들어대도 괜찮다. 다만 합창단의 앙상블이 아쉬운 순간이 많이 드러난다. 


안토넨코가 투리두와 카니오를 모두 맡았다. 이전에 "투리두와 카니오가 전혀 다른 역할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안토넨코의 노래를 들으면서 바로 이해하게 됐다. 안토넨코의 투리두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데 반면 발광하는 카니오에는 적격이다. 투리두는 정말 이도저도 아니라, '내가 왜 이런 가수를 괜찮다고 생각해왔지'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다행히 카니오에서는 오텔로 빙의해서 날뛰더라. 

아리아만 따로 떼어놓고 들으니 그렇게 썩 잘하진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에 네다 죽이겠다고 날뛰는 장면이 훨씬 인상적이다.


잘츠부르크에서 토니오를 맡았던 디미트리 플라타니아스Dimitri Platinias가 알피오와 토니오를 모두 맡았다. 힘있는 바리톤으로 무난한 인상을 준다. 뭘 해도 믿음직스러운 베스트브룩Eva-Maria Westbroek이 산투차로 등장한다. 산투차의 매력을 한껏 뽑아내는 가창을 선보인다. 

투리두가 삽질하니 산투차가 캐리하신다. 


의외의 발견은 네다를 맡은 카르멘 잔나타시오Carmen Giannattasio다. 시몬 보카네그라 영상은 물론 정명훈과의 롯데 콘서트홀 때 내한했던 가수기도 하다. 두 번 모두 별로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여기선 상당히 괜찮은 노래를 선보인다. 네다의 아리아에서 템포를 상당히 빠르게 가져가면서 네다의 자유에 대한 열망과 욕구불만을 폭발시킨다. 

아 근데 솔직히 이런 옷 입고 노래부르는거 반칙 아닙니까. 노래에 집중을 못 하잖아요. 아무리 요즘 오페라가 비주얼 장사라곤 하지만 이런 노골적인 연출을 해주시면 읍읍
사실 트레일러 보면 알겠지만 네다 뿐만 아니라 롤라도 읍읍


헤어스타일과 분장이 정말 완벽하게 잘 어울린다. 저 영상이 조명빨과 화장빨이 좀 제대로 안받는 장면이고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 때는 실비오의 마음은 물론 관객의 마음까지 뺏어간다.

분장의 중요성. 같은 가수 맞습니다. 의상은 여전히 읍읍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까지 몰아줬으니 실비오가 노래를 잘 불러야할텐데 디오니시오스 소우르비스Dionysios Sourbis는 딱히 탁월하지 않다. 솔직히 팔뚝 + 그리스 얼굴 보고 캐스팅한듯.  그 외에 맘마 루차 역을 맡은 엘레나 칠리오Elena Zilio의 연기는 너무 과장되고 어색해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다 말아먹는다. 연출이 비중을 키워놨는데 그걸 오히려 다 망쳐먹더라. 미키엘레토가 캐릭터를 너무 이상하게 잡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어색하고 볼품 없었다. 


종합하자면 2015 잘츠부르크의 아성을 뛰어넘긴 어려워보인다. 그 공연은 틸레만과 슈퇼츨이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며 작품을 완전히 휘어잡는데 파파노와 미키엘레토는 디테일에서 아쉬울 때가 있다. 특히 미키엘레토의 간주곡 스와핑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무리수였다. 팔리아치 간주곡만 지켜냈어도 팔리아치 자체는 아주 훌륭한 공연이 됐을 텐데. 두 작품을 하나로 이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낳은 끔찍한 혼종이었다. 

뭐 그리고 어차피 안토넨코가 아무리 잘 한들 카우프만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글고 보면 안토넨코가 영상물 낸 게 오텔로와 서부의 아가씨, 카발/팔리, 투란도트인데 서부의 아가씨는 이미 카우프만이 똑같이 니나 슈템메와 함께 영상을 내서 안토넨코 영상은 세컨 초이스로 내려갔다. 카발/팔리도 카우프만에 밀렸는데 이제 카우프만이 오텔로 데뷔하면 오텔로의 왕좌도 위험하지 않을까. 칼라프 역시 카우프만이 데뷔만 하면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은 역할이라 비교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크 쓰고보니 정말 핵노답 진성 카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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