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구도청 자리에 새로 자리잡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음악 전용홀이 없다보니 아직 가볼 일이 없었다.


올해 초에 뒤모가 자기 페북에 6월 내한 일정을 소개했었다. 페북에서 팔로잉하는 가수가 몇 안되는데 (카우프만, 네트렙코, 프로하스카 정도) 뒤모가 그중 한 명이었다. 세종 솔로이스츠와 예당에서 공연하는 건 알았지만 시간이 안 맞았다. 거기에 아무리 그래도 성량에서 손해볼 수밖에 없는 카운터테너 두명을 데리고 바로크 음악을 하는데 콘서트홀은 좀 너무하지 않나.


그래서 못 보는구나 하고 있었던 찰나 우연치 않게 이 공연을 발견했다. banffer님 블로그에서 김세일 씨가 김정운 교수와 시인의 사랑을 공연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어머니께 추천드릴 겸 아시아문화전당 홈페이지를 둘러봤는데 뒤모 공연이 떡하니 있는 거다. 거기다 400석 규모의 작은 극장에 전석 무료!


유럽에서 가장 핫한 카운터테너를 코앞에서 보는데 공짜라니. 티켓 예약 오픈날 아침에 대기 타고 무사히 예매해뒀다. 


서울에서는 라르고나 울게하소서 처럼 유명한 곡들이 프로그램에 들어가있었지만 광주 공연은 그 곡들 대신 로델린다, 줄리오 체사레의 아리아들이 포함돼있었다.

 

세종 솔로이스츠의 연주를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개개인이 훌륭한 솔리스트이면서 동시에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앙상블을 해온 단체이기도 하다. 강효 교수가 대관령음악제 감독으로 있던 시절 음악제의 중추를 맡기도 했다. 외국인 단원이 껴있다는 건 알았지만 비중이 이렇게 높은지는 몰랐다. 수석진은 모두 외국인이었다.


1부는 헨델로만 이루어졌고 합주협주곡 op. 6의 1번으로 시작했다. 세종 솔로이스츠의 기량은 탁월했지만 걱정했던 대로 바로크 음악에는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느린악장에서 무거운 템포와 짙은 비브라토는 굳이 시대연주 스타일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너무 낭만적이었다. 빠른 악장은 조금 더 나았지만 여전히 요즘의 스타일과는 동떨어져있었다. 오직 테오르보 소리만이 홀로 바로크스러움을 살려내기 위해 분투했다. 그래도 성부간의 균형이 상당히 잘 이루어진 편이었고 첼로 수석을 비롯한 통주저음 파트가 안정적인 앙상블을 이끌어줬다. 


데이빗 대니얼스는 로델린다의 아리아 두 곡을 불렀다. 상당히 유명한 카운터테너이지만 이름을 들어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영상만 보다보니 영상에 나오지 않는 가수들은 전혀 모르게 되더라. 너무 흔해보이는 이름도 한몫 했을 테다. 


대니엘얼는 안드레아스 숄과 발성 스타일이 비슷하게 들렸다. 간결한 비브라토를 종종 구사했지만 우리가 흔히 카운터테너하면 떠올리는 청아하고 투명한 목소리였다. 대체로 울림이 퍼져나가는 느낌을 주며 홀을 가득 메우는 노래를 들려줬다. 

로델린다가 처음 등장하여 궁상맞게 우는 아리아 Dove sei, amato bene를 편안한 프레이징으로 여유있게 불렀다.

오늘 모든 아리아는 느린 노래와 빠른 노래가 쌍으로 엮여있었다. 뒤이어 부른 Confuda i miri l’infida consorte는 대니엘스가 기교를 과시할 수 있는 곡이었는데 빠른 템포에서도 투명한 음색을 대체로 일관되게 유지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뒤이어 뒤모가 등장했다. 뒤모는 1부에서 플라비오의 Amor, nel mio penar, 줄리오 체사레의 Se in fiorito ameno prato, 아리오단테의 Dover, giustizia, amor를 불렀다. 


뒤모의 목소리는 대니얼스와 완전히 달랐다. 대니얼스가 전통적인 카운터테너라면 뒤모는 영상에서 듣었던 대로 훨씬 개성있는 소리였다. 카운터테너의 목소리에서 드라마틱함이 느껴지는 기이한 체험을 했다. 대니얼스의 목소리가 퍼져나가는 형태라면 뒤모의 목소리는 초점에 맞춰 상당히 밀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음보다 오히려 저음에서 더 매력이 넘치는 소리를 들려준다. 물론 부드러운 고음도 아주 인상적이지만 굵은 저음은 다른 카운터테너에겐 기대할 수 없는 매력 포인트다.


플라비오의 아리아에서 독특한 목소리의 매력을 마음 껏 뽐낸 다음 줄리오 체사레의 아리아에서 부터 여유있게 노래를 곱씹어 표현해냈다. 바이올린 독주 오블리가토가 있는 아리아로 줄리오 체사레에서도 유명한 아리아다. 독주 바이올린과 자연스레 대화하며 까다로운 장식음들을 맛깔나게 처리했다. 줄리오 체사레에서 톨로메오를 맡은 영상만 세 개인데, 체사레의 아리아를 부르는 걸 듣는 건 처음이었다. 앞으로 줄리오 체사레를 맡은 영상물도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로델린다의 두 곡을 암보로 노래한 대니얼스와 달리 뒤모는 앞의 두 곡을 악보를 보며 노래했다. 하지만 요즘 한창 잘츠부르크에서 공연하고 있는 아리오단테의 아리아를 부를 때는 보면대를 살포시 낮춰놓고 실력을 백분 발휘했다. 


상당히 빠른 템포로 이어지는 콜로라투라 패시지들은 정말로 압도적이었다. 18세기에서 관객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갔던 카스트라토 가수들의 모습이 이랬을 테다. 깔끔한 음정, 무섭게 긁어주는 저음, 여기에 짧게 폭발하는 고음 까지 짧은 곡 안에서 자신의 능력을 백분 발휘했다. 요새 한창 아리오단테를 집중적으로 공연하고 있는데 작정한 레퍼토리를 얼마나 완벽하게 소화해내는지 보여줬다.



2부는 퍼셀과 비발디로 이뤄졌다. 퍼셀의 샤콘느 역시 낭만 소스 한가득 뿌린 연주라 듣고있기 힘들었다. 


퍼셀 오이디푸스 중 Music for a while은 툭 때어놔도 충분히 감동적인 가사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통주 저음에도 첼로를 제외해 베이스가 가수 옆에 서서 연주했다. 뒤모의 목소리가 부드러운 프레이징과 결합돼 호소력 있게 다가왔다.


Sound the trumpet은 예습하며 들은 음반이 앨리손 발솜의 연주라 원래 트럼펫이 부르는 노래인 줄 알았다. 찾아보니 원래 카운터테너를 위한 듀엣이다. 대니얼스와 뒤모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대비를 이뤄 독특한 인상을 줬다. 뒤모의 노래를 들을 때는 뒤모가 대니얼스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는데 둘이 함께 들으니 둘의 장단점이 달랐다. 뒤모의 소리는 대니얼스에 비해 힘이 들어가 있는 편이다. 대니얼스는 상당히 편하게 노래하니 뒤모의 목소리가 조금 건조하게 느껴지는 느낌이 있었다. 그럼에도 뒤모 목소리가 훨씬 좋은 걸 보니 확실히 내 성악 취향에는 가수 목소리에 힘 좀 들어가 있어야 하나보다.


비발디 두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에서도 느린 악장은 역시나 너무 지루했다. 하지만 빠른 악장에서 두 솔로의 기량과 전체 앙상블의 합주가 뛰어나 즐겁게 들을 수 있었다. 기교는 스타일을 넘어서기도 한다.


스타바트 마테르의 돌로로사는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한악장만 따로 떼어내니 살짝 어색한 느낌이다. 반면 바야젯의 Barbaro traditor에서는 대니얼스의 노래도 훌륭했지만 세종 솔로이스츠의 경쾌한 보잉이 빛을 발했다. 앵콜로는 뒤모와 대니얼스의 듀엣을 한 곡 불렀다.



뒤모의 목소리와 노래는 ‘세상에 없던 카운터테너’라고 표현할 만 했다. 79년생으로 아직 40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어떻게 유럽 오페라 무대를 휘어잡을 수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것도 무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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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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