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악할만큼 저열한 연출. 

 

다른 이야기를 할 것도 없다. Va pensiero에서 위안부 소녀상과 대문짝만한 "한" 글자를 넣은 건 김학민 연출만도 못한 수준 낮은 연출이었다. 포다가 연출을 더럽게 재미없게 하고 논리성도 떨어지는 건 자주 봤지만 저렇게 대놓고 얕은 수를 쓰는 건 다른 차원의 충격이다.

1) 이 연출은 이 장면 전까지 전형적인 포다 연출로, 시대적 공간적 배경을 알 수 없는 의상과 무대 배경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사회적 이슈를 전면으로 드러내기 위해 빌드업 같은 걸 한 것도 아니다. 진짜로 이 연출을 한국의 역사와 결부시키고 시켰으면 이 한 장면만 뜬금없이 가져오는게 아니라 오페라 전체를 그에 맞게 연출했어야 한다. 하지만 포다는 그러지도 않았고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 전까지 포다는 히브리인과 바빌론인을 그냥 하얀색과 빨간색 물감처럼 활용한다. 포다에게 극의 논리적 개연성 같은 건 아무 쓸모가 없는거기 때문에 2막에 아비가일레가 왕위를 찬탈하는 엔딩에서 히브리인과 바빌론인이 모두 동시에 아비가일레를 높이 들어올린다. 포다에게 무대 위의 합창단원은 히브리인과 바빌론인이 아니라 그냥 색의 형태이기 때문에 아비가일레를 빨간색과 하얀색 산이 들어올리는 그 이미지만 중요하지, 아비가일레가 왕위를 찬탈하는 모습을 본 히브리인의 반응 따위는 중요하지 않고, 히브리인과 바빌론인이 똑같은 반응을 대칭적으로 완성하게 시킬 뿐이다. 
이미지를 위해 논리적 개연성을 파괴하는 건 나부코가 벼락맞아 미치는 장면에서도 보인다. 벼락은 나부코가 맞았는데 왜 쓰러지긴 합창단이 쓰러지냐? 이성을 잃은 나부코의 모습을 보며 수근거리는 장면이 없으니 이건 뭐 나부코가 미친건지 남들이 다 쓰러져 죽은건지도 모르겠더라.

의상과 벽면은 포다 연출 어디에선가 그대로 재활용했다고 해도 믿을만큼 진부한 포다 그 자체였다. 아무 이유 없이 무용수들이 무대를 바쁘게 뛰어다니는 건 너무 포다스러워서 웃음이 날 지경이었고, 4막 페네나 아리아에서 의미없이 페네나를 걷게 만들기 위해 회전시키는 중앙 회전판은 무대 틈사이에 이물질이 껴서 거슬리는 소음만 내는 조악한 연출이었다. 무슨 애니메이션 오프닝도 아니고 왜 맨날 뛰고 걷기만 함? 

포다는 이 어이없는 va pensiero 장면 연출을 합당하게 설명할 만큼의 연출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았다.

2) 전형적인 K-신파는 관람객의 눈물을 짜내기 위해 모든 장치를 다 동원한다. 그런 신파적 장치를 쓰는걸 본적 없는 포다가 여기선 아주 대놓고 뻔한 수를 쓴다. Va pensiero 전주에서 어린 여자아이들이 등장하는 거 보고 치트키 입갤하네 라고 생각했는데, 여기다가 누가봐도 위안부 소녀상의 의자 모양인 의자와 의자 위에 서있는 여자 아이들의 형상이 천장에서 내려온다. 그걸 보면서 내가 보고 있는 게 설마 소녀상인가. 에이 아니겠지, 연출가가 사람xx면 그럴 수가 없지. 그러던 와중에 무대 뒷쪽 벽면이 조금씩 열리더니 글자가 보인다. 아 설마 아닐거야. 설마 저게 한글은 아니겠지. 다른 모양일거야... 하는데 벽면이 다 열리니 명확하게 보이는 "".... 진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포다가 원한건, 이건 히브리 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너희들 한국인들의 이야기라고! 너가 모를까봐 내가 여기저기 다 써주는건데, 이건 너희들이 잊지 말아야할 너희들의 역사야! 이 음악을 들으며 위안부의 아픔을 떠올리라고! 그러니까 울어라!

한국 관객들이 머저리라서 위안부 소녀상이랑 "한" 없으면 히브리 합창 들으면서 아이고 다른 나라 이야기네 하고 있을 줄 알았나. 도대체 관객을 얼마나 멍청한 사람이라고 무시해야 이런 연출을 할 수 있지?

3) 한 국가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이 따위로 소비해도 괜찮은가.
너무나 노골적이라서 유치하다는 점 이외에도, 연출의 무능함을 만회하기 위해 남의 트라우마를 그냥 가볍게 가져다 쓰는 자세가 너무 역겹다. 이 작품에서 제일 중요한 장면, 제일 유명한 노래, 관객에게도 제일 어필할 수 있는 장면에서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 그냥 편한걸 아무거나 가져다 쓴 느낌이다. 

그래놓고 왜 마지막에 아비가일레는 소녀상 처럼 의자 두개 놓고 앉아서 노래 부르나? 아비가일레도 사실 피해자다? 우리 모두 소녀상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자?

 

나부코 히브리 합창 때 역사적인 아픔을 끄집어내는 연출은 물론 많다. 하지만 이전 까지의 장면에서 모두 추상적이기 짝이없는 모습만 보여주다가 맥락없이 이렇게 남의 아픔을 쉽게 가져다 쓰는 연출은 첨 본다.

 


정신을 가다듬고 쓰는 나머지 후기.

일단 해오름극장의 리모델링은 상당히 성공적이다. 솔직히 그 전에는 정말 근본없이 거대하기만 한, 세종대운동장 v2 느낌의 극장이었다. 객석 좌우폭이 37미터였다니 참 거대한 크기인데 여기에 객석 수가 1500여석 밖에 안된다는 게 놀랍다. 기억이 나는건 객석 열간 간격이 상당히 넓어서 앉아있는 사람들 앞으로 지나가는게 전혀 불편하지 않았던 것. 옛날에 찍어놓은 사진이 없어서 비교가 어렵지만 당시 3층 좌우 끝에서 보면 정말 세종 부럽지 않은 거리가 나왔다. 

매우 칙칙했던 걸로 기억하는 검은색 내부마감 역시 밝은 우드톤으로 바뀌어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피트는 여전히 작아서 아예 깊게 내리고 관악기는 아예 무대 밑으로 들어가는 구조였다. 말굽형 구조에 조금 더 가까워졌고 예당 오페라하우스 보다는 괜찮은 음향이었다.

홍석원의 지휘는 여러모로 탁월했다. 인스브루크 극장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기에 제대로 된 오페라 지휘를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전반적으로 날카롭고 간명한 사운드를 가져갔고 베르디의 여러가지 전형적인 반주 패턴을 그때그때 맛깔나게 잘 살려냈다. 트럼펫이나 팀파니의 소리가 튀지 않고 전체 조화를 잘 이룬 것 역시 흔한 한국 오페라 반주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분위기 전환을 만들어 내는 능력 역시 탁월해서 감탄이 나오는 장면들도 있었다. 같은 piano 여도 평이하고 지루해질 수 있는데 긴장감을 주는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가수와 반주가 어긋나는 포인트들이 있었지만, 이 공연이 홍석원의 아이디어 대로 완성되었다면 음악적으로 훨씬 재미있었을 테다.

합창단은 실망스러웠다. 일단 장엄한 사운드를 노린 건지 합창단의 수가 너무 많아서 오케스트라의 가볍고 날렵한 사운드에 비해 너무 비대한 소리를 냈다. 지휘자의 템포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고 어택에서 자신있게 치고 나오지 못해 대부분의 경우에 음표의 시작이 흐리멍텅하고 음표 뒤에서야 겨우 커지기 시작했다. 2막에서 이즈마엘레와 함께 나오는 장면이었나, 합창단이 오케스트라의 템포를 이어받지 못해 지휘자가 템포를 늦출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었다. 속으로 아 여기 인스브루크 아니지 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가지 않았을까.  프로그램북도 안봤던 터라 합창단이 어디 오브리 합창단일 줄 알았는데 커튼콜 때 국립합창단이라고 해서 놀랐다. 3,4막 합창은 그래도 훨씬 나았던 것 같은데, 1,2막에선 연출 지시 때문에 지휘자 보기 어려워서 더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Va pensiero를 아무리 잘 불러봤자 연출때문에 음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극 중 음악 비중이 높은 나부코, 아비가일레, 자카리아가 전반적으로 실망스러웠다. 아비가일레는 워낙 어려운 역할이긴 하지만 가수의 음역대와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고음 부분은 좋았지만 저음에서의 음색이나 발성이 고음과 너무 달라 너무 들쑥날쑥한 느낌이었다. 아리아에서 표현 역시 내 기준으로 너무 과장됐다. 나부코 역은 세월의 흐름을 피해가지 못했고 울림도 아쉬웠고 호흡도 간혹 긴 프레이즈를 소화하기에 힘들어보였다. 이즈마엘레 역의 정의근은 지휘자의 흐름에 맞춰 템포를 긴밀하게 끌고 나가는 모습이나 노래 자체든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줬는데 비중이 낮은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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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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