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
서부의 아가씨는 상당히 불친절한 작품이다. 보엠/토스카/나비부인을 연달아 성공시킨 푸치니는 이후 부터 대중성 따위는 개나주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작품을 쓴 게 아닐까. 서부의 아가씨의 음악은 전작들 보다도 외투에 훨씬 가깝게 들린다.

구성으로 치면 토스카와 유사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 극 중 등장 배경이 매우 남초 집단이라 여자가 소프라노 이외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워클이 있지만 거의 역할이 없으므로 무시하겠다), 극에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극의 진행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며 소프라노의 질투를 사는 여성의 존재 (아타반티와 니나), 주역 삼인방의 성격과 음색과 서로간의 관계가 매우 유사하다는 점, 소프라노가 독실한 신자라는 점, 2막에서 소프라노와 바리톤이 테너를 놓고 거래를 한다는 점 등등 말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음악적으로 전작들과 너무나 다르다. 1막에서의 수수께끼 같은 끝맺음이라던가, 2막에서 키스장면이나 마지막 도박에서의 승리장면에서 음악이 로맨틱한 쾌락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국을 연상시킨다던가 말이다. 그래도 민니와 존슨의 이중창 중에 나오는 선율은 상당히 달콤하고 아름다워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오페라의 유령에 베껴쓰기도 했는데, 푸치니는 이 선율 마저도 만끽할 여유를 주지 않고 넘어가버린다. 

오페라 분류할 수 있는 재밌는 기준은 남녀 주인공이 서로를 처음 만나는 장면이 극중에 등장하는가 등장하지 않는가이다. 사랑이 오페라의 핵심 주제라면 둘이 서로 눈이 맞는 장면이 오페라 안에 등장하고 (보엠, 카르멘, 오네긴, 나비부인, 마농, 퐁탱블로 숲 장면이 안 짤린 동카를로 등등.. 트라비아타는 비올레타가 알프레도를 처음봤으니 포함시키자.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바그너 전통답게 설명충장면으로 첫만남을 충분히 묘사하니 역시 포함시켜도 될 것 같다), 그렇지 않은 작품들은 사랑은 핑계일 뿐이고 결국 다른 갈등이 더 중요하다는 거다 (아이다, 탄호이저, 명가수, 리골레토, 토스카, 마탄의 사수 등등). 서부의 아가씨 역시 어렴풋한 기억속으로는 첫번째 카테고리에 속하는 작품이었는데 그러고보니 민니와 딕 존슨은 이미 구면이다. 그렇다면 민니와 딕 존슨의 연애를 핑계삼아 이야기 하고 싶었던 진짜 주제는 무엇일까.

그렇게 치면 역시 광부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1막과 3막의 많은 부분에서 푸치니는 이들을 묘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단순히 분량적인 면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에서 눈물샘을 자극하는 포인트들은 죄다 광부들의 장면에서 나온다. 푸치니는 대본 상으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포인트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그걸 음악으로 폭발시킨다. 라보엠 4막 미미가 1막을 회상하는 장면, 토스카 3막 처형장면, 나비부인 2막 초초상이 핑커톤의 편지를 읽는 장면이 그렇다. 이 오페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들은 모두 이 합창단이 부른다. 3막에서 민니가 광부들을 설득하는 장면은 정말로 푸치니스럽다.

푸치니의 오페라는 잔니스키키를 제외하고 모두 새드엔딩으로 끝난다. 투란도트는 다 못쓰고 죽었으니까 역시 제외. 그렇다면 서부의 아가씨는 어떤가. 아주 예외적으로 아무도 안 죽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광부들의 입장에서보면 자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새드 엔딩이다. 나는 소노라가 "우리에게서 황금보다도 더 귀중한걸 훔쳐갔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참 절절하게 다가온다.

키스 장면에서도 아름다운 사랑의 듀엣을 부르지 못하는 이 커플에게도 아름다운 멜로디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 선율이 오페라에서 언제 처음 등장하는지를 생각해보면 바로 광부들이 민니와 존슨을 위해 왈츠를 흥얼거려주는 부분에서 같은 모티프가 등장한다. 이 멜로디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도 소노라가 광부들을 설득하고 둘을 보내주자고 말하는 장면이다. 결국 민니와 존슨의 사랑은 이 광부들이 지켜보는 속에서 시작했고 이들의 축복으로 완성됐다.

 

- 연출
전반적으로 군더더기 없는 연출이었다. 1막에는 재미있는 포인트들이 여럿 있었는데 2,3막은 평범했다. 1막에서 랜스는 상당히 소심한 인물로 표현된다. 보통 랜스를 마초남으로 묘사하는게 보통인데 이번 연출에서는 랜스가 보안관으로서의 당당한 모습과 민니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모습을 잘 보여줬다. 민니가 등장하고 모든 사람들이 민니에게 달려들자 랜스는 오히려 무대 맞은편에서 자기 마음도 표현하지 못하고 소심하게 앉아있다. 민니가 다른 사람들과 한참 이야기를 끝낸 뒤 그제서야 랜스에게 먼저 인사를 건내는데 그 때 랜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인사를 받는다. 찾아보니 리브레토 상에서도 민니가 멀리 떨어져있는 랜스를 발견한다고 돼있는데, 정말 랜스를 무대 끝에 놓여있는 생각의자에 앉혀놓고 민니의 인사에 아주 기뻐하며 뛰쳐나가듯 민니에게 다가가다 제지당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랜스가 민니 앞에서 얼마나 작아지는지를 재밌게 보여준다. 민니가 다른 광부들과 이야기할 때에도 멀리서 외곽만 빙빙 돌 뿐이다. 랜스가 민니에게 사랑 고백하는 장면도 대본 상으로는 자연스럽게 둘만 남게 되지만 일부러 랜스가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는 것으로 보여줬다. 찌질한 소심이 랜스가 남들 다 있는 앞에서 그렇게 대놓고 구애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랜스를 이렇게 보여줬기 때문에 2막에서 카드게임을 지고 Buona notte!만을 외치고 황급히 퇴장하는 모습이나 3막에서 민니가 등장하려하자 사람들에게 빨리 존슨을 처형하라고 다그치지만 정작 본인이 직접 죽일 생각은 못하는 모습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전반적인 무대나 조명 역시 완성도가 높았다. 1막의 폴카 건물의 벽에는 여기저기 구명이 나있었는데 여기에 조명을 쏘며 빛이 자연스럽게 갈라지는 광경을 잘 활용했다. 특히나 샹들리에를 쏘는 조명 빛이 샹들리에를 지나며 잘게 갈라지는 모습이 멋진 광경이었는데, 테너가 고음을 부르는 하이라이트 때 이 조명 밑을 지나가게 동선을 짜며 무대 효과를 극대화했다.

합창단의 연기지도는 연출의 성패를 가를 만큼 중요한 요소인데, 이 지점에서 평균 이상은 한 것 같다. 1막의 난투 장면은 나름 역동적이었지만 다들 한명씩 짝지어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보다 조금더 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3막 라미레즈를 사로잡는 장면에서 합창단이 갑자기 보여준 군무는 마오리 하카를 연상시켰는데 음악과는 잘 어울렸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그리고 너무 짧게 등장해서 좀 뜬금없다는 인상을 줬다.

1막에서 quanto piangerà 라며 다같이 고향을 생각하는 노래를 부를 때 무대에서 단 한명 만이 그런 감상에 젖은 사람들을 아니꼽게 쳐다보며 혼자 도박 테이블만을 기웃거리는 모습이 있었다. 나중에 보니 그 사람이 바로 도박판에서 장난질하다가 손모가지 날아갈 뻔한 시드였다. 이 광부 커뮤니티가 대부분 선량한 사람들이며 사기를 치는 시드 같은 인물은 애초부터 이 집단에 속하지 못 하다는 걸 보여주는 듯 하다. 3막에서 닉과 소노라가 민니의 등장 때부터 민니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보호하는 모습 역시 이들을 숨겨진 주인공으로 격상시키는 데 효과적이었다.

다만 내가 뛰어난 연출에 기대하는 것, 그동안 이 작품을 봐오면서 느꼈던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부분은 역시 이탈리아 연출답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인디언에 대한 심각한 인종차별도 비꼬는 것 같지도 않고 너무나 나이브하게 그대로 표현한게 아닐까 싶었다. 임산부 모습을 한 워클이 계단을 계속 오르내리고 있는걸 보고 있는것 자체가 본능적으로 불편하게 다가왔다.

 

- 가수
세명의 주역가수가 모두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다. 민니 역의 경우 1막에서는 조금 아쉬웠지만 2막과 3막은 흠 잡을 데 없었다. 1막의 민니 파트가 유독 빡세다 보니 아쉬움보다는 저런 걸 불러야하다니 안타깝다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마르코 베르티는 영상에서도 종종 봤던 가수인데, 영상에서는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직접 들으니 성량이 어마어마하다. 연기도 없고, 프레이징이나 표현력이 세련된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성량 원툴 하나가 갖는 압도적인 힘을 보여줬다. 실연에서 고음을 이 정도 깔끔하게 이 정도 성량으로 내지를 수 있는 가수는 정말 귀하다. 나이든 가수가 흔히 보이는 과한 비브라토도 없이 안정적인 목소리로 보여줬다. 목소리 음색이나 노래 스타일이 딕 존슨과 잘 어울린다고 말하긴 어려웠지만 쩌렁쩌렁한 성량 하나만으로도 불만을 날려버리기 충분했다.
[리뷰의 conflict of interest를 위해 명시하자면 팬질을 열심히 하다보니 양준모님과 조금의 친분이 있습니다] 
잭 랜스 역의 양준모 역시 이 역할에 안성맞춤인 목소리와 노래스타일을 보여줬다. 알베리히나 클링조르에서 보여줬 듯 원채 악역에 잘 어울리는 목소리이고 그 카리스마가 스카르피아나 잭 랜스 같은 푸치니 역할과도 역시 잘 맞는다. 성량과 음색, 표현, 그리고 연기까지 모두 두루 갖춰 다른 주역들에 비해 뭐 하나 빠지는 모습 없는 클래스를 보여줬다.

- 반주 & 합창
내 기억엔 남아있지 않지만 2013 돈카를로 반주를 맡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의 오케스트라 파트가 매우 난해한 편이기에 큰 기대를 안 했는데 아주 정교하며 잘 정리된 반주를 보여줬다. 특히나 코리안 심포니의 연주 퀄리티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가수가 잠시 흔들려도 뒤이어 치고 나오는 금관이 너무나 깔끔하고 꽉찬 소리를 제대로 내어줬기에 음악의 효과가 확실히 살아날 수 있었다. 2막에서 긴장감을 자아내는 짧은 아티큘레이션의 음표들도 잘 표현됐고 전반적인 리듬감 역시 탁월했다. 

합창단의 퀄 역시 기대이상이었다. 첫날 공연이면 으레 그렇듯 앙상블 불안하고 하는 장면들이 나올 줄 알았는데 1막과 3막의 중요한 파트를 아주 잘 살려냈다. 오케스트라나 합창단이나 코시국이라 다들 공연이 없다보니 연습 시간 확보가 용이해진건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지 모르겠는데 그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수준의 완성도를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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