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믿고 듣는 그리스 지휘자입니까?

무엇을 볼까요 아무거나 골라봅시다 하다가 잡힌 타이틀이었다. 칼스루에에서 어쩌다가 매년 헨델 페스티벌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2월에 헨델의 생일을 기념해 거의 3주간 열리는 페스티벌로 성장했다. 칼스루에 좋은 극장이지만 헨델 페스티벌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영상물이 발매됐을 것 같진 않다.

데카에서 열심히 밀어주는 카운터테너인 막스 에마누엘 첸치치가 타이틀롤과 연출을 맡았다. 연출이요? 당신은 비야손입니까? 비야손도 자기가 노래부르면서 연출을 맡진 않았을 텐데??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하고 감상하기 시작했다. 아는 가수도 없었고 칼스루에에서 하는 공연의 퀄리티가 월클일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서곡부터 상당히 강렬했다. 지휘는 George Petrou, 악단은 Armonia Atenea 였다. 지휘자도 처음들어보고 악단도 처음들어봤다. Anima Eterna, MusicAeterna같은 이름을 따라한 흔한 HIP악단 정도로 생각했다.

연주를 들을 수록 반주의 생기나 하프시코드와 함께 공격적인 느낌을 잘 살린 저음이 좋았다. 찾아보니 지휘자가 그리스 인이었다. 역시 근본있는 지휘자였구만? 악단 이름도 다시 보니 에테르나 같은 이름이 아닌 "아테네"아 였다. 알파벳 표기를 보면 조지 페트루 라고 읽고 싶어지지만 그리스어로는 Γιώργος Πέτρου이고 발음을 찾아보니 요르고시 페트루에 가까웠다. 첸치치랑 사이가 좋은지 앨범 작업도 많이했고 이 외에도 프랑코 파지올리, 자비에르 사바타 같이 잘나가는 카운터테너의 독창 앨범 반주도 맡았다. 무엇보다 데카에서 야심차게 내놨던 The 5 Countertenors의 반주를 맡았으니 이쯤되면 공인된 카운터테너 전문 반주쟁이라 할 수 있다. 반주 사운드가 참 좋아서 관현악을 해도 잘했을 텐데 데카에서 오페라 말고는 하나도 안 내준건가 찾다보니 딱 하나 있더라. 바로 베토벤의 프로메테우스 창조물 전곡반.

거 참 마이너한 작품 맡겨줬네 하고 생각해보니, 설마 그리스인이라고 그리스 신화 잘 아니까 맡긴건가....? 어째 앨범 커버도 그리스 조각상 포즈마냥  나게 뽑아뒀다. 그리스 인이 국적 버프를 받을 수 있는 작품이 베토벤한테 있었다니 이걸 몰랐네ㅋㅋㅋ 들어보니 연주도 상당히 괜찮다. 녹음 장소도 그리스뽕 넘치게 아테네의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홀이다.

 

그리스 지휘자를 접한 감격에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다. 작품 이야기로 돌아오면, 아르미니오는 헨델 작품 중에서 잊혀진 축에 속한다. 첸치치가 악보를 보고서는 이거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고 상연하기로 한건데, 음악을 들어보면 어느 정도 공감이 간다. 특히나 1막에 나오는 음악들이 텐션이 높고 강렬해서 지루할 틈 없이 봤다. 작품의 배경은 서기 9년경 로마제국과 게르만 인들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아르미니오가 게르만 족장이고 아내는 투스넬다. 하지만 로마 장군인 바로가 아르미니오를 공격하여 사로잡는다. 그런데 바로는 아르미니오의 부인인 투스넬다를 사랑하고 있다. 투스넬다는 남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남동생인 시지스몬도를 붙잡고 하소연한다. 시지스몬도는 또 아르미니오의 여동생인 라미세와 연인 사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겹사돈인 셈인데, 문제는 시지스몬도와 투스넬다의 아빠이자 아르미니오의 장인이며 또다른 게르만 족장인 세제스테가 아르미니오를 싫어한다는 점이다. 바로가 아르미니오를 붙잡을 수 있었던 것도 세제스테가 배신했기 때문. 분명히 아르미니오는 1막에 붙잡히는데 바로가 처형을 이런저런 이유로 미룬다. 결국 3막에서 누나와 연인의 압박에 시달린 시지스몬도가 아르미니오를 감옥에서 구출해내며 전세가 뒤집어지는 걸로 해피엔딩을 맞는다는 이야기다. 

쓸데없이 너무나 복잡하다는 점에서 아주 바로크 오페라스러운 줄거리다. 대체로 전형적인 인물상이지만 타이틀롤의 표면상 가장 큰 적인 바로가 상당히 긍정적이고 낭만적인 인물로 묘사된다는 점이 재밌다. 이 공연에서 바로 역을 맡은 후안 산초Juan Sancho가 멋지게 잘 소화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가수들은 모두 상당히 괜찮다. 바로 역의 후안 산초는 초반에 나오는 기교적인 아리아를 어렵지 않게 처리해내는 걸 보고 놀랐다. 헨델 부르는 테너 중에 이런 기교를 갖춘 가수를 별로 못 본 것 같은데 말이다. 목소리도 너무 미성인 스타일이 아니라 노래에 힘을 줬을 때 충분히 장군 같은 느낌도 잘 났다. 투스넬다 역의 로렌 스누퍼Lauren Snouffer도 깔끔하게 잘 소화해냈고 아르미니오 역의 첸치치 역시 자기 명성 만큼 괜찮은 노래를 보여준다. 

 

문제는 연출이 빈약하다는 점이다. 애초에 프로덕션 나오는 가수가 직접 연출을 맡는다니, 이건 뭐 호세 쿠라나 할 것 같은 짓을... 일단 무대 배경을 19세기 나폴레옹 시대로 옮겨두었는데 너무 진부해졌다. 원작대로 로마시대로 표현했으면 나름 희귀한 배경이 됐을 텐데, 오페라 하면 떠오르는 그 가장 식상한 배경으로 옷을 입고 나온다. 여기에 전문 연출가가 아니니 극 중 연기나 동선도 너무 단출해졌다. 무대 의상 조명 디자이너는 따로둬서 거대한 원형 무대를 좀 있어보이게 만들었지만 이걸 통해서 하는 거라곤 노래하면서 회전하는 원형무대 위를 쳇바퀴 마냥 열심히 걸어다닐 뿐이다. 시지스몬도와 라미세를 개그캐로 표현하는 시도는 괜찮았지만 그 이외에 노래 전체에 연기가 너무 많이 비었다. 오페라 시작부터 끝까지 무대 톤도 너무 변화없이 식상하고. 비야손 연출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비야손은 원래도 연기력 쩌는 가수였는데, 이 공연을 보니 첸치치 본인도 그저 어색한 콘체르탄테 식 연기만 보여줄 뿐이다. 찾아보니 첸치치가 주역/연출을 맡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이것도 미스터 네트렙코 같이 끼워팔기 압력을 넣은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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